여전히 예술성을 향해 도전하고 있고, 이를 위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노력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순재 역시 “요즘 노력하는 배우들이 참 많더라”며 후배들을 칭찬했다. 자신의 제자이자 후배이기도 한 유연석을 보며 “연석이가 학생일 때는 지금처럼도 못 했어.(웃음) 그래도 많이 노력을 하더라고. 지금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좋아, 잘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끔 ‘작품’이 아닌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그는 “원래 연기란 시작할 때부터 ‘나’는 없어지는 거다”며 “아무리 자신이 톱스타이고 어떤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든, 그 역할이 재연되면 안 되는거야”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런데 어떤 작품을 해도 자꾸 ‘본인’이 나오는 배우들이 있어. 그러니 이걸 시켜도 저걸 시켜도 다 똑같은 연기가 나오지”라고 덧붙였다.
이순재는 후배 ‘김명민’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연기에 임하는 태도를 극찬했다.
“김명민은 작품이 들어가면 외형부터 바꾸더라고. 살을 빼든 뭘 하든. 그게 연기의 기본적인 자세란 말이야. 그게 본질이에요. 그런데 요즘 젊은 배우들 중에는 멋있게만 나오려고 하고, 인기로 위세를 떨치려는 사람도 있더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자기함정에 빠지는 거야. 연기자는 부단히 자기 반성과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연기를 잘한다고 칭찬을 해도 나의 부족한 점을 늘 깨닫고 발전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단 말이지. 그건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마찬가지야. 우리도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야지.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 토론도 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 아니겠어? 우리 ‘세일즈맨의 죽음’을 할 때도 젊은 제작진들에게 작가 아서 밀러의 기본적인 의도, 그러니까 원작을 존중해 달라고 말했어. 아서 밀러 작품은 장난 칠만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동의하며 하나씩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순재는 생방송처럼 진행되는 국내 드라마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쪽대본’을 바로 외워 밤새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은 대사를 보고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배우들에겐 연기적으로 잘못된 처방전을 계속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 “연기력은 연습시간에서 나오는 것, 촉박한 녹화 현장에서는 연습시간을 가질 여력이 없다. 거기서 오는 문제점이 크다”라고 강조했다.
“대사를 외우고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또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것도 아무나 데려와도 다 할 수 있는 거야. 대본이 다 나오던 시절에는 배우들이 모두 연습과정을 거쳤지. 지금은 그 과정들이 완전 생략돼버린 거야. 그러니까 그냥 연기를 대충 넘어간다고. 지금도 나이 먹은 배우들은 자기들이 하는 장면을 다 맞춰보고 NG없이 연기를 해. 그런데 내가 현장에 가면 젊은 배우들이 대사는 안 맞추고 자기 대사만 외우고 있더라고. 이게 독백은 아니잖아. 서로 주고 받는 건데.”
이순재는 한 현장에서 젊은 후배를 야단친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그 때가 아마 새벽 2시 정도였을 거야.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이 모두 피곤한 상태이긴 했다”라고 말을 이어나갔다.
“대본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네’라고 하는 거였어. 그런데 그냥 건조하게 ‘네’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연출이 그냥 ‘오케이’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다시 찍으라고 했지. 그리고 내가 상대 연기자에게 ‘지금 네게 굉장한 일이 일어난 건데 그렇게 반응을 하는 게 맞나. 또 나를 어떻게 쳐다봐야 하는지, 왜 쳐다봐야 하는지 이해를 하고 봐야 하는 거다’라고 한 적이 있어. 배우가 연습 시간 자체가 없으니 대본 분석을 어떻게 하겠나. 그러니 안타까울 따름이지.”
그는 과거 자신이 활동했던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이순재는 “예전 우리가 했던 작품들의 작가들은 문단에 등단한 대가들이었다. 그러니 대본을 쓸 때 대사 한 마디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 때는 드라마 자체가 생방송이었으니 대사를 틀리면 작가들에게 ‘연기를 그 따위로 하냐’며 혼이 나기도 했다. 이후 편집이 안 되는 녹화 시절에는 2/3까지 다 촬영을 하고 있는데 한 배우가 접속사 하나를 비슷하게만 써도 처음부터 다시 촬영을 했다. 대본에 있는 접속사를 쓰려고 작가들이 몇 시간을 고민해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요즘에 그러면 젊은 친구들이 다 도망가더라고. 연기가 쉬운 게 아니다. 쉬운 작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평생을 해도 안 되는 게 바로 연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는 이순재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언어훈련’이다. 그는 “연기는 대사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지 않나. 그래서 말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제일 먼저 가르친다”라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학생들과 워크숍 작업을 하기도 했다. 작품 하나를 정해서 한 달 공연을 위해 열심히 연습을 시킨다. 주로 고전 명작을 다루며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제자들과 함께 연습에 임한다. 그는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는 배우는 언어구사력이 중요하고 수준도 중요하다”라며 “우리나라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에 배우들은 언어 수준을 높여 연기 수준도 높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순재가 맡은 워크숍은 ‘평등’을 기반으로 진행이 된다. 연기를 잘 한다고 주연을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주연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이건 실전이 아니지 않나. 교육의 기능은 평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연기가 부족하다고 해서 기회를 주지 않으면 평생 단역으로만 쓰일 거라고. 학생들은 연습을 하면 달라질 수 있어. 잠재된 능력이 발휘될 기회를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유연석이 지금처럼 말을 잘하는 친구가 아니라고. 내가 세종대학교에 있을 때 유연석이 ‘리어왕’에서 ‘에드거’ 역을 맡았는데 열심히 나와서 하더라고. 석 달을 쥐나게 연습을 했었지. (웃음). 한지혜도 내 학생이었는데 그 때 드라마 촬영을 하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작업은 같이 못했었지. 현업이니 어쩔 수 없이 빠지는 거잖아. 대신 ‘너 친구들 연습할 때 간식이나 많이 사와라. 그리고 스타라고 대우는 못 해줘. 대신 돈 많이 벌잖아’라며 말했더니 지혜도 웃으며 알겠다고 하더라고. 그랬던 적이 생각이 나네.(웃음)”
→인터뷰③에서 이어집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