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김선생님,노래가틀리셨잖아요”

입력 2008-01-17 1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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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평균 62세 뮤지컬 ‘러브’ 연습현장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든 중견연출가 윤호진 에이콤 대표는 요즘 안 하던 일을 하고 있다. 중극장 뮤지컬 ‘러브’를 준비 중인 그는 배우들의 식사도 일일이 챙긴다. 그뿐만 아니다. 연습실 곳곳에는 자양강장제, 배즙을 비롯한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갖다놨고 ‘혈압약’과 안정제까지 준비했다. 배우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무섭게 야단치던 그였지만 요즘은 “○○○ 선생님” 하며 공손한 어투로 정중히 ‘지적해 드린다’. 얼마 전 동료들에게 “박자를 놓친다”는 지적을 받고 배우 한 분이 눈물을 흘리며 나가버린 적이 있어 늘 조심스럽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앙상블들이 노래할 순서가 되면 조용히 무대 쪽으로 걸어가 귀띔을 해준다. 배우들이 간혹 자신의 차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러브’의 연습 풍경은 이렇게 여느 작품과 조금 다르다. ‘러브’ 출연진의 평균 나이는 62세. 윤 대표는 “젊은 배우가 어색하게 얼굴에 주름을 그리고 머리에 허옇게 분칠하고 나와서 보이는 연기는 한계가 있다. 좀 더 실감나게 노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로맨틱 코미디 식상” 젊은 관객들도 호기심 요즘 공연계에 노년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19일 막이 오르는 뮤지컬 ‘19 그리고 80’은 19세 청년과 80세 할머니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한때 잘나갔던 할아버지와 연상의 욕쟁이 할머니가 황혼기의 사랑을 만들어가는 ‘늙은 부부 이야기’는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만화가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올 상반기 연극 제작에 들어간다. 이 만화는 폐지 줍는 할머니와 우유 배달원 할아버지의 사랑을 뭉클하게 다룬 작품이다. 이처럼 중장년층과 노년층 관객을 위한 공연이 늘어난 이유는 이 시장이 ‘블루 오션’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의 주 관객층인 20, 30대 싱글 여성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는 이미 넘쳐나는 실정이고, 개그콘서트류의 코미디도 호객 행위를 하는 등 경쟁이 치열하다. 이에 비해 중장년층과 노년층 공연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편이다.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늙은 부부 이야기’는 이제 관객의 70%가 50대 이상이 차지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제작하는 트라이프로의 박정은 기획팀장은 “중장년과 노년층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에 식상한 젊은 관객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노년의 삶을 그린 작품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족한 노인 배우… 공개오디션도 열어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지만 노인 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부족하다. 국내 뮤지컬 시장이 로맨틱 코미디 중심으로 흘러가다 보니 노년 배우들의 층이 얇기 때문이다. 2인극인 ‘늙은 부부 이야기’도 2003년 초연 당시엔 30대 남녀 배우가 ‘늙은’ 부부 역을 했다. 이 작품을 제작한 공연기획자 마종락 씨는 “연기는 잘했지만 아무래도 삶에서 우러나는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듬해부터는 극중 배역과 비슷한 60대 배우를 캐스팅했다”며 “나이든 배우들이 제 나이의 배역을 하니 관객들도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어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노인인 ‘러브’가 배역을 위한 오디션을 연 것도 이 때문. 윤 대표는 “국내 배우 명단을 훑어봤지만 노인 역을 맡길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TV에서 활동 중인 중견 배우 중에는 뮤지컬을 할 만큼 노래를 잘하는 분이 적더라”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오디션에서 각 배역을 모두 2배수로 캐스팅해 똑같이 연습시킨다는 것. “나이가 적지 않은 배우들이다 보니 건강 문제 등 유사시에 ‘대타’로 출연할 노인 배우를 확보하기 위해서”란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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