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난큰무대딱!호랑이굴서애국가튼다”

입력 2008-04-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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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엄마, 아빠 어디 가셨어요?” 꼬마가 아빠를 찾아 나섰다. 탁구장 문을 열었다. 네트 너머로 오고가는 작은 공을 꼬마는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켓 잡는 법을 가르쳐 준 적도 없었지만 눈썰미가 좋았다. 중학생을 이기는 6살, “아빠, 나 이거 재밌어.”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은 탁구부로 유명한 서울의 모 초등학교를 찾았다. “탁구부는 4학년부터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인천으로 갔다. 간단한 테스트만으로도 도화초등학교 코치는 신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경기 중 풀리는 신발 끈을 혼자 맬 줄도 몰랐지만 경기는 잘도 매듭지었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꼬마는 당돌하게 “국가대표 선수”라고 답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뒤 밀려드는 사인요청. 멋진 흘림체는 꼬마가 12년 전부터 연습하던 것이다. ○근성 4학년이 6학년을 이기고 있었다. 상대 팀 감독이 본부석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경기가 중단됐다. “5학년부터 경기에 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규정위반”이라고 했다. 꼬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경기장을 나섰다. 중학교 3학년,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유럽에서 투어대회가 있을 때면 부모는 가슴을 졸였다. 한 대회당 경비는 500만원 가량. 한 달에 한 번꼴로 대회가 있었다. 실업팀 선수와는 달리 자비를 들여 비행기를 타야했다. 부모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줄였다. 아들은 악착같이 이겼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쯤 일본 탁구 용품회사에서 스폰서를 자청했다. 고교 3학년, 뛰어난 실력 때문에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다. 하루아침에 무적(無敵)에서 무적(無籍)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 분데스리가 뒤셀도르프에서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아버지 유우형(53)씨는 “만약 그 때 러브 콜이 없었다면 선수생활을 접었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했다.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힘들어요. 저 돌아가고 싶어요.” 부모의 가슴도 쓰렸지만 “실력만이 살 길”이라고 다그쳤다. 어머니 황감순(51)씨는 “(유)승민이를 탁구 신동이라고 하지만 사실 주변 여건들은 전혀 받쳐주지 못했다”고 했다. 듀스에서 발휘되는 집중력, ‘타고난 승부사’라는 꼬리표. 하지만 그의 근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슬럼프? 2004년, 신동(神童)은 신(神)들의 도시 아테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삼성생명 강문수(59) 감독은 “3개월 정도는 금메달리스트의 기분을 만끽하라”고 여유를 줬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과 행사들. 훈련에 100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2005년 세계선수권. 64강에서 떨어졌다. 언론의 뭇매가 이어졌다. “잘못했을 때 위로해주는 게 진짜인데….” 어머니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상한다. “저는 사실 슬럼프가 아니었습니다.” 유승민이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중국 선수에게 이길 확률은 2004년이나 지금이나 20가 안돼요. 슬럼프 때문이 아니라 제가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진 거죠.” 올림픽 때는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스웨덴의 탁구 영웅 발트너가 중국의 마린과 유럽의 강호 티모 볼(독일)을 잡아줬다. 유승민은 4강에서 발트너를 꺾었다. 결승에서 만난 세계 최강 왕하오는 부담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반면, 유승민의 컨디션은 경기를 치를수록 최고조를 향해 달려갔다. “세계선수권에서는 1999년, 2001년, 2003년 모두 64강에서 졌어요. 2007년에서야 4강에 올랐습니다. 모두들 올림픽 금메달만 기억했던 거죠.” ○도전 목표의식이 사라졌던 것은 아닌지 물었다. “제가 시상대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했던 말은 ‘도전자의 자세로 준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승민은 백핸드에 약점을 보이는 전형적인 펜홀더 스타일이다. 올림픽 이후 집중 견제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노출됐다. 최고의 기량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완할 것들이 많았다. 유승민의 현재 세계랭킹은 8위. “내가 딱 그만큼의 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금메달을 딸 수 있는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20-30정도? 하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앞뒤가 어긋난다. “중국 선수들과 10경기를 하면 한 두 경기 밖에 못 이긴다”고 했었다. “저는 큰 경기에 강합니다. 제 실력의 최고치를 끄집어내봤어요. 4년 전에 제가 느끼고 경험한 가능성을 믿습니다. 이번에도 4강에만 가면 금메달 딸 수 있습니다.” 가장 솔직한 사람이 가장 용감할 수 있다. “나는 강하지 않다”는 말에서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안산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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