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쇼의등장과박찬호,그리고김재현

입력 2008-05-27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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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팬들은 조범현 감독이 전병두를 SK에 넘긴 사건을 잊지 못한다. 만 23살의 왼손투수. 아직 1군에서는 보여준 게 없이 실망스러움 뿐이지만 좌완의 파이어볼러는 지옥 끝에까지 가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야구의 속설을 단단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 좌완의 파이어볼러가 스무살이라면 어떨까? 선발로 97마일(156km)를 던지고 커브는 배리 지토의 전성기 시절보다 더 하다면? 루키 리그에서 더블 A까지 정복하는 데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202이닝을 던지는 동안 삼진은 무려 264개나 된다. 이런 선수 가만히 놔둘 수 있는 사람, 어디 손 한 번 들어봅시다. 이미 몇 사람은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클래이트 커쇼. 2006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7순위 LA Dodgers.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1라운드로 지명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지만 커쇼에게는 7번까지 내려왔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이미 7번째 픽을 가지고 있던 다저스 역시 내심 커쇼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제 자기 차례까지 내려올지는 미지수였으니 말이다. 고작 2년째 스프링캠프를 맞았던 올해 개막전을 앞두고 네드 콜레티 단장은 커쇼의 피칭이 이미 메이저리그 선발투수가 될 만큼 자라있다고 극찬했다. 다만 이미 5선발이 완성돼 있던 다저스의 로테이션에 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미래를 내다보고 달리는 팀도 아닌 다저스가 굳이 그를 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에스테반 로아이자가 결국 팀에서 내쫓기고, 선발진에 조금씩 구멍이 생기자 팬들은 득달같이 커쇼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겨우 스무살의 투수가? 트리플 A도 거치지 않았는데 뭘, 박찬호는 이미 100승도 넘긴 투수잖아. 올해 그의 성적을 봐, 그는 선발로도 잘 할 투수라고!
한국시간으로 지난 18일 1차 대결에서는 박찬호가 이겼다. 그러나 8일 후인 26일 2차전에서 다저스는 결국 커쇼를 선발 로테이션에 넣었고, 그는 빅리그 첫 등판에서 6이닝 2실점으로 승패는 없었지만 꽤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였다. 그날 다저스는 연장 승부 끝에 안드레 이디어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했다. 18일에도 그렇고 26일에도 다저스는 경기 바로 며칠 전까지 선발투수를 정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고심하는 분위기였다. 불펜에서는 박찬호와 함께 궈홍치가 선발로 간택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커쇼는 마이너리그에서 등판 일정까지 바꿔가며 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 토레 감독이나 콜레티 단장이 26일 경기의 선발도 쉽게 결정내리기 어려웠다는 점은 18일 등판을 마친 박찬호는 무려 8일 간이나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왜? 커쇼와 박찬호가 다저스 선발 로테이션의 라이벌이라서? 커쇼 때문에 박찬호가 기회를 잃을까봐? 아니면 반대로 박찬호 때문에 커쇼가 기회를 잃을까봐서? 어떤 경우로든 셋 다 정답은 아니다. 커쇼가 다저스 로테이션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시간상의 문제이지 박찬호와 연관이 없고, 그런 점에서 박찬호의 선발 라이벌은 오히려 커쇼와 채드 빌링슬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궈홍치를 포함한다면 4명)이지 절대 커쇼는 아니다. 1990년대에 다저스 팬들이 대런 드라이포트-박찬호가 선발투수로 등장하길 원했듯이 지금의 팬들은 빌링슬리와 커쇼의 원투펀치를 머릿속에 잔뜩 그리고 있다. 오히려 가능성, 재능, 마이너에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커쇼는 더 빨리 올라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레티 단장은 그 타이밍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미 커쇼 이전 최고의 유망주 투수였던 벤 디긴스, 에드윈 잭슨을 별 볼 일없는 투수로 만든 다저스였고, 콜레티가 브라이언 세이빈 밑에서 부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는 제롬 윌리엄스, 부프 본저, 커트 에인스워스, 제시 포퍼트가 처음의 무시무시한 기대와는 달리 무참하게 사라진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제대로 키우자면 시간이 걸리고, 시간만 흐르면 경험도 쌓지 못한 채 사라지고. 콜레티가 그것을 걱정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박찬호가 한 번의 기회를 챙겼지만, 콜레티의 고민은 우리의 입장에선 아쉽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It′ll be sooner rather than later.″ 콜레티의 결정은 커쇼의 빅리그 선발 꿈을 이루게 했고, 반대로 박찬호는 결국 9일 만에 다시 불펜 투수로 나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리글리필드에서 그는 직구에 다소 난조를 보이며 안타, 볼넷 등으로 2사 만루의 위기를 맞았지만 라이언 테리엇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 이닝을 넘겼다. 커쇼가 선발로 자리를 잡고 박찬호가 위기 상황에서 이닝을 넘겨주는 불펜투수로 남는 지금의 장면이 어쩌면 다저스가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물론 박찬호가 올 시즌 30이닝 방어율 2.10으로 최근 어느 해보다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왜 2점대 선발요원이 선발투수로 나서지 못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성적은 개인의 기록이지 팀 실정은 그 팀의 사정에 맞추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SK의 서른 중반 지명타자는 3할의 타율로 3번을 치지만 왼손 투수가 나오면 벤치로 내려가는 플래툰 플레이어이다. 그 팀에는 역시 3할을 넘기고 있는 20대 초반의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왜 3할 타자가? 왜 3번 타자가? 그 팀에는 그런 질문이 무모하다. 그래도 불만? 그렇다면 이제 선수가 나가는 방법이 있다. SK에 그 베테랑 타자는 올 시즌이 끝나면 FA가 되고, 박찬호는 지금도 말만 잘 하면 지명할당으로 당장 새 팀과 계약할 수 있다. 물론 부추기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음에도 그런 움직임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 걸 보아 아직 둘 다 소속팀에 만족하고 있는가보다. 한 선수에게는 13년 만에 우승반지를 안겨준 지금의 팀이 소중하고, 또 한 선수에게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주며 81승을 거두었던 지금의 팀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당장의 서러운 위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선수로의 경험만 자라는 게 아닌가보다. 그들의 생각도 자라 있었다. ☞mlbpark 유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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