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블랙&화이트]국수전에서엿본‘적과의동행’

입력 2008-11-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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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수전의 도전기 첫 판은 전남 목포시의 이훈동 정원이란 곳에서 두어졌습니다. 이곳은 조선내화 창업주인 전남일보 이훈동 명예회장의 자택으로 세계 야생종 수목들과 석탑, 정원석 등이 가득한 아름다운 호남의 명소입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모래시계’등의 촬영장소로 사용됐으며, 전라남도 문화재 사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고 하지요. 아시는 대로 이번 도전기의 주인공은 국수 이세돌 9단과 도전자 목진석 9단입니다. 바둑대국이 지방에서 두어질 때면 두 대국자 외에도 꽤 많은 인원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번 국수전만 해도 주최사인 동아일보와 한국기원 관계자, 입회인, 대국기록자, 계시원, 취재진 등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목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늘상 보아왔지만 언제 보아도 낯선 이미지 하나가 있습니다. 두 대국자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대국을 앞둔 두 사람의 심리상태가 꽤 미묘하고도 민감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절친한 사이라 해도 다음 날이면 바둑판을 마주하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하는 만큼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집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서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관계자들도 이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어지간하면 말을 걸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주변 사람들마저 가슴이 퍽퍽해질 정도로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밥을 먹을 때입니다.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 따로 행동을 하는 대국자들도 밥을 먹을 때만큼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방 같은 곳에서 대국을 하게 되면 으레 지역에서 만찬행사 같은 것을 열게 됩니다. 그런데 접대하는 쪽에서는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열이면 열 두 대국자를 헤드 테이블에, 그것도 나란히 자리를 만들어 놓습니다. 지역의 높으신 양반들이 함께 하는 밥상에서 적장(?)과 앉아 먹는 밥이 맛있을 리가 없습니다. 대부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 숙소로 들어가 버리곤 하지요. 대국이 열린 날. 두 대국자와 한 밥상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바둑판 대신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묵묵히 밥만 먹었습니다. 마치 막 법정을 나선 이혼 부부의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에 평소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기자도 밥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날 도전1국은 이세돌 9단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복기를 마치고 검토실로 들어온 목진석은 몹시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속이 좋지 않다며 빈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예 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세돌 9단 역시 승리의 기쁨을 자제하는 듯 보였습니다. 잠시 후 김성룡 9단이 약봉지를 들고 오더니 목진석 9단을 찾습니다. 근처에 약국이 없어 목포역까지 걸어가 사왔다고 합니다. 김성룡 9단은 이번 국수전의 도전권을 놓고 목진석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였던 사람입니다. 최종 도전자 결정전에서 목진석에게 0-2로 완패해 그토록 원했던 국수전 도전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김9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후배 약을 챙겨 먹여야겠다며 사라졌습니다. 늘상 보아왔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승부사들이란. 양형모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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