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音談패설]‘도밍고의여인’소프라노이지영

입력 2009-01-20 04: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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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의 내한 공연은 오페라의 황제라는 칭호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일깨운 감동의 무대였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꽉꽉 채운 1만 여 명의 관중을 도밍고는 ‘혼수상태’ 직전까지 몰고 가는 신들린 듯한 마력을 발산했다. 이날 도밍고는 두 명의 여인과 함께 했다. 성악계의 ‘마릴린 먼로’, ‘마돈나’로 불리는 메조 소프라노 캐서린 젠킨스. 그리고 오늘 만나볼 한국의 소프라노 이지영(36)씨였다. 도밍고는 이지영씨와 2부 첫 곡으로 마스카니의 ‘체리듀엣’을 불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씨의 목소리는 1부에서 혼자 부른 베르디의 리골레토 중 ‘그리운 이름’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인간의 감성을 극한까지 자극하는 그녀의 눈이 아닌 ‘귀 부신’ 고음에 기자를 포함한 관중들은 몇 번이나 땀 쥔 손을 움켜쥐어야 했다. 이날 공연은 사실상 이씨의 첫 국내 데뷔무대. 이씨는 현재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워싱턴내셔널오페라단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르멘의 미카엘라, 돈조반니의 체를리나, 라인의 황금에서 보글린데 역 등을 맡아왔고 특히 지난해에는 리골레토에서 여주인공 질다 역을 맡아 ‘환상적인’, ‘빛을 발하는’, ‘눈부신’ 등의 격찬을 미국 언론으로부터 받았다. 무엇보다 도밍고로부터 “가슴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란 칭찬을 들었다. 이씨는 조만간 로스엔젤레스 오페라단과의 리골레토에서 질다 역을 다시 한 번 맡을 예정이다. 한참 뒤늦은 나이인 고3 때 성악을 시작한 이씨의 이력은 꽤 드라마틱한 데가 있다.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원, 보스톤 론지음대에서 오페라를 공부한 뒤, 모교인 연세대(이씨는 연세대 출신 미래여성지도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씨는 미국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었다. 고민 중에 이씨는 도밍고가 운영하는 ‘도밍고 카프리츠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전 세계에서 재능이 뛰어난 젊은 음악인들을 초청해 계약을 맺고 성악레슨부터 연기지도, 영어·불어·독일어·이태리어 등 어학교육까지(심지어 경제적 지원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신의 노래를 담은 CD와 서류를 보냈더니 워싱턴으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오디션은 4차까지 치열하게 진행됐다. 최종 오디션은 도밍고가 직접 심사위원석에 앉았다. “왜 안 떨리겠어요. 그래서 마음을 달리 먹었죠. 어차피 이 분이 싫든 좋든 10분은 내 노래를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 오디션이 아니라 이 분 앞에서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자. 살면서 과연 몇 명이나 도밍고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라고요.” 이씨에 대한 도밍고의 애정과 신뢰는 대단하다. 이번 내한 공연과 앞서 가진 가지회견에서도 도밍고는 자신에게 집중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이씨에게 배려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곁에선 본 도밍고는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품이 너무도 훌륭하신 분이세요. 품격이 있으면서도 소탈하시죠. 사실 그 분과 저는 ‘레벨’이 다르잖아요. 같은 무대에서 듀엣을 불렀다는 자체가 저를 배려하신 거죠. 그 분이 세계 최고의 테너 자리에 오르시고, 또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 분이 지닌 따뜻한 카리스마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아가씨’ 주역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오페라에서 오프닝 공연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VIP들이 이날 대부분 참석한다. 주연은 더블캐스팅이었고, 오프닝은 이태리 소프라노가 맡기로 했다. 축하 리셉션 장소 역시 이태리대사관이었다. 오프닝 공연에는 이태리 장관도 직접 보러 왔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이씨가 오프닝 공연에 서게 됐다. 공연에 앞서 도밍고가 무대에 오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도밍고는 주연이 바뀌게 된 사연을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지영은 오늘 공연될 연대의 아가씨(원제는 연대의 딸)처럼 우리들이 키운 워싱턴오페라단의 딸입니다. 깊은 애정을 갖고 공연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공연이 대성공이었음을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씨는 한 10년쯤 뒤에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을 해보고 싶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소리가 좀 더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욕심을 부리다 목이 망가져서 반짝하고 사라진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첫 무대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기뻐요. 앞으로도 국내에서 좋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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