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기자가간다]부산축구단과함께한지리산등반

입력 2009-01-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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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기어기어코!…네발로정상오르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다’는 말처럼 지리산은 남한 제 2의 고봉 천왕봉(1915m)에서 서쪽의 노고단(1507m)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만 반야봉(1732m) 등 1500m가 넘는 고산 준봉이 10여개나 줄지어 버티고 서 있는 웅산 중의 웅산이다. 이 가운데 노고단은 지리산 3대 주봉 중 하나로 지리산 종주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노고단 산자락 끝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화엄사에 부산 선수단이 모였다. “선수들에게 성취감과 단합정신을 심어주고 싶어 지리산 등반을 계획했다”는 황선홍 부산 감독의 의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산행코스인 셈이다. 한겨울의 지리산 등반, 과연 그 실상은 어떤지 부산 선수단과 함께 해봤다. ○영상 8도→최악 기상여건 노고단 등반 전날인 17일 오후, 전남 구례구역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영상 8도였다. 1월 중순의 날씨에 영상 8도라니. 부랴부랴 준비한 등산복과 등산화, 아이젠 등 등산장비 세트가 큰 짐처럼 무겁게 느껴져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등반 당일인 18일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오전 8시 30분 화엄사를 출발했을 때 장대비로 바뀌었고, 7km 구간의 화엄사-노고단 코스의 절반을 통과할 즈음에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시작은 여유만만 황선홍 부산 감독은 “무릎이 좋지 않아서”라며 이날 강철 코치와 함께 선수들보다 1시간 이른 7시 30분경 노고단으로 향했다. “우리랑 함께 올라가는 게 나을 텐데요”라는 황 감독과 강 코치의 충고에 “저도 1주일에 한 번씩 축구해요. 체험기 쓰려면 선수들과 같이 해야 의미가 있죠”라고 호기를 부릴 때만 해도 여유가 넘쳐흘렀다. 출발 10여분 전, 30명의 선수들이 나눠먹을 생수와 오렌지주스, 귤과 초코바가 도착했다. 할당된 양은 일인당 생수와 오렌지주스 1병, 초코바와 귤은 2개씩. “윤 기자는 좀 더 여유 있게 가져가세요.” 정승은 주무가 오렌지주스를 1병 더 내밀었을 때 “뭔 소립니까. 공평하게 받아야죠”라며 손사래를 쳤다. 귤은 가방 안에서 터질까봐 아예 챙기지도 않았다. 불과 1시간 30분 후의 운명을 미처 알지 못했던 어리석음이여. “산에서 자기 몸은 알아서 챙기는 겁니다”는 고성민 코치의 농담에 “당연하죠”라고 받아쳤다. ○그러나 출발 후 1시간 출발은 괜찮았다. 선수시절 관악산을 구보로 뛰어다니며 훈련했다는 윤희준 코치의 무용담을 들으며 줄곧 선두권을 유지했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던 윤 코치와 말이 끊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점차 윤 코치가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물 한 모금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물 마실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나 자신을 다스렸다. ‘윤 코치가 먼저 한 모금 마시자고 제안하지 않을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생수병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참다 참다 못해 결국 마시게 된 물. 한 모금만 마신다는 게 벌써 반이 줄었다. “이따 정상에서 봐요.” 윤 코치와 선수들 몇몇이 나를 두고 쏜살같이 올라간다. ○산에서도 ‘버티고 현상’? 본격적으로 위기가 닥친 시기는 2.5Km 구간을 지나면서부터였다. 주위에 선수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무심코 지나쳤던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등산로에는 500m 간격으로 다목적 위치 표지판이 있다. 01-XX 중 01은 지리산 주능선을 뜻하고 XX는 지점을 나타낸다. 구조대원들은 이 표지판으로 위치를 식별한다. 물은 이미 다 마셨다. 손을 댈 것 같지도 않던 초코바도 어느새 먹어치웠다. 남은 것은 오렌지주스 1병 뿐. 정 주무가 내밀었던 주스와 귤이 눈에 아른아른하다. 3km 구간을 지나면서 비는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다. 질척질척하던 바닥도 온통 눈밭이다. ‘뽀득뽀득’ 경쾌한 소리와는 반대로 점차 무거워지는 마음. 아이젠을 안 가져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조종사가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해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거꾸로 날아가는 것을 ‘버티고 현상’이라 하던가. 어디가 등산로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간다. ‘밤도 아니고 환한 대낮에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고 마음을 다잡지만 서서히 공포가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때 우연히 만난 한 등산객. “거기서 뭐 하세요? 등산로는 이쪽이에요.” ○기념사진도 못 찍을 뻔 6km 구간까지는 두 발이 아닌 숫제 네 발로 올랐다. 기어서 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 2-3m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시야 넘어 노고단 산장이 보이자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장에 서 있는 양동현이 어찌나 반가운지. “어? 아까 나보다 뒤에 있지 않았어요?” “한참 아까 지나쳐 갔거든요.” “아…. 근데 왜 정상까지 안 가고 여기 있어요? 동현씨 만난거 보니 나도 생각만큼 늦지는 않았나보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거거든요.” 알고 보니 추운 날씨에 선수들이 감기에 걸릴 것을 염려해 황 감독이 산장 안에서 쉬도록 지시했단다. 이날의 1등은 골키퍼 최현이었다. 그는 최악의 기상여건 속에서도 바람같이 달려 딱 2시간 만에 터치패드를 찍었다. 황 감독과 대부분 선수들도 모두 2시간 20분 이내에 등반완료. 노고단 정상 돌탑에 올라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 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부산 선수단과 기념사진 한 장 찍지 못할 뻔했다. 이제 드디어 하산의 시간. 성삼재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비교적 무난하다. 선수들이 무리해서 자칫 부상이라도 당할까봐 내려오는 길은 이처럼 평탄한 코스로 정했다. 이제야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노고단의 절경에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마다 안개와 구름이 밀려드는 노고단 운해는 지리산 8경 중 하나로 꼽힌다고. 황 감독의 한마디. “보약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보약이라니. 보약 두 번 먹었다간 제 명에 못 살겠다. 너무 긴장이 풀렸나? 내려오는 길에도 두 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온다. 구례 |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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