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한달용돈과맞바꾼연필한다스

입력 2009-03-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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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 시절 연필 열두 자루 세트를 꼭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집에 언니와 저, 그리고 동생까지 모두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어머니는 연필을 한 세트 통째로 사주신 적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연필도 긴 연필은 써보지 못 하고, 늘 몽당연필을 썼습니다. 그 당시 긴 연필은 우리 집에 유일한 아들, 막내 동생 차지였습니다. 엄마는 “막내가 아직 얼라고, 1학년이니까 연필을 제대로 못 잡잖나. 느그들이 누나들이니까 양보허고 니 동생이 긴 연필 쓰고 닳으면 느그들이 몽당연필 써라” 하시면서 늘 동생에게 긴 연필을 주셨습니다. 동생이 3학년이 되고, 5학년이 되도 엄마는 ‘야가 아직 얼라잖아∼’ 하시면서 늘 긴 연필을 동생에게 주셨습니다. 언니와 저는 동생이 쓰고 작아진 몽당연필에 볼펜 자루를 끼워서 쓰곤 했는데, 그나마 그 볼펜 자루도 많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한두 개 가져다주시면 그제야 연필을 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전거에 옥수수며, 고구마며 밭에서 키운 작물을 싣고 자전거 행상을 다니셨는데 거래처에서 볼펜 자루를 주시거나, 길거리에 볼펜자루가 떨어져 있으면 그걸 저희에게 가져다주시곤 했습니다. 그 때는 우리 아버지가 사무실에 앉아 볼펜 쓰는 직업을 가지셨다면 더 많은 볼펜 자루를 가질 수 있었다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가져다주신 볼펜 자루는 하얀 색깔은 온데간데없이 때가 꼬질꼬질 묻어 내놓기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새 연필을 쓰려면 언제나 엄마에게 지금 쓰고 있는 연필을 가져가, 도저히 쓸 수 없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전엔 절대 사주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가끔 엄마 손을 잡고 새 연필을 사러 문구점에 갈 때도 있었는데, 저희 엄마는 연필 두 자루 이상은 절대 사주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연필 열두 자루가 가지런히 담겨 있는 상자를 열어, 그 중에서 단 두 자루만 꺼내 제 손에 쥐어주셨을 때 저는 그 연필 상자에서 눈을 못 뗐습니다. ‘저거 통째로 다 사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엄마 앞에서 그런 얘기는 입도 벙긋 못 했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와 언니는 큰 결심을 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께 용돈을 받아내기로 한 거였습니다. 당연히 부모님은 안 된다고 하셨는데, 반애들 다 받는데 왜 우리만 용돈을 못 받느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제야 저희 부모님께서 고민을 하시더니 저희에게 매달 500원씩 용돈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엔 500원이 파란 지폐였는데, 생전처음 지폐를 손에 들어보니 기분이 정말 묘했습니다. 저와 언니는 그 돈을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사이에 끼어 고이고이 모셔뒀다가, 부모님이 외출해서 집이 빈 날, 그 돈을 들고 문구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매불망 너무나 갖고 싶었던 연필 열두 자루 세트 그 중에서도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린 제일 좋은 연필 한 세트를 사왔습니다. 그 때 가격은 지금도 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한 세트가 300원!! 너무 좋아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문득 신학기가 다가오니 기다란 연필과 함께 신데렐라 그림이 그려져 있던 분홍색 자석 필통도 생각납니다. 지금이야 연필 정도는 그냥 굴러다니는 물건이지만, 그 때만 해도 정말 아껴 쓰던 귀한 학용품이었습니다. 그 때는 필통 속에 긴 연필 가득 담고 학교 갈 때, 부자가 된 듯 정말 기분 좋았죠. 어느 덧 제 나이 서른아홉, 우리 조카 신학기 용품 사줄 생각하니,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부산 진구 | 이은경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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