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문화프롬나드>초콜릿을깨물어먹듯,웅산을들었다

입력 2009-10-04 15: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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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깨물어 먹듯, 웅산을 들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자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세상은 한층 각박해질 것이다) 남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날이 있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마음이 베인 날, 하늘이 맑아 노을이 붉게 지평선 위로 깔리는 저녁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행위에 썩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부족한 남자는 여자에 비해 위로를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른다. 그저 어둡고 습한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상처를 할짝할짝 핥을 뿐이다.

상처받은 남자는 어둑한 거리를 걷다 술집을 발견한다. 술의 역사는 곧 남성에 있어 치유의 역사와도 같다.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옛적부터 남자들은 술로부터 위안을 얻어 왔다. 그것은 상처 위에 뿌리는 소염제와도 같다. 아픔이 멎지만, 이내 또 다른 아픔이 밀물처럼 달려온다.
그러면 또 다시 베인 상처에 술을 뿌린다. 그렇게 아픔을 잊고 살아간다. 조금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남자는 살고, 늙고, 죽는다.

술잔에 담긴 호박색 위스키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다. 그리고 주문을 외운다. 삶은 고(苦)다. 즐거운 인생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리라지. 한 세상 술이나 마시다 가면 되는 거야(이건 아닌 것 같지만).
무대를 향해 한 여자가 느릿느릿 걸어간다.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든다. 여자는 천천히 무대 밖을 돌아본다.

그녀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세상의 짐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닮지 않는 남자다. 그는 혼자서 석 잔째 스트레이트를 마셨다. 그의 눈이 그녀와 마주친다.
여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마치 그에게 부르는 듯 노래한다. 속삭인다.

왜 이리 아픈가요.
내 지친 작은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간 내 못난 슬픈 사랑의 죄가.

왜 이리 아픈가요.
내 가슴을 도려낸 비난도
참아야만 했던 내 못난 슬픈 사랑의 죄가.

내 바보 같은 사랑은 눈이 멀어서
보이지 않아요. 그대만 보여요.
내 바보 같은 사랑은 귀가 멀어서
들리지 않아요. 그대만 보여요.
(웅산 작사 ‘지독한 사랑’ 중에서)

웅산의 목소리는 상처를 치유한다. 나른한 속삭임은 일상의 날에 베인 상처를 부드럽게 매만져준다. 마치 ‘원래 그런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지만, 다들 다시 일어서요. 당신도 일어나세요. 내가 손을 잡아줄 게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웅산의 신보 ‘miss mister’는 아껴듣고 싶은 음반이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며(예를 들어 책을 읽으며) 흘려듣고 싶지 않다. 나만의 동굴 속에 감추어두었다가 때가 되면 꺼내 듣고 싶은 음반이다.
‘miss mister’는 그래서 곧바로 듣지 않았다. 일주일쯤 후, 노을이 광화문을 붉게 물들이던 날, 유독 해가 달처럼 명료해진 날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두 눈을 감아요.
당신에게 드릴 비밀스런 선물이 있어요.
날 안아줘요. 하늘의 별들도
모두 지쳐서 사라질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랑 가진 집시처럼
황홀한 마법을 걸어줄 테니.
(웅산 작곡·작사 ‘카르멘’ 중에서)

웅산은 감성의 한계점을 얄미울 정도로 적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감성을 한계점까지 끌고 가지만 조금도 천박하지 않다. 계산이 되어 있지만, 거기엔 차가운 이진법의 느낌이 없다. 음악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경계선 위를 걷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안다.

초콜릿을 깨물어 먹듯 아홉 곡을 들었다. 한 곡을 듣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음 곡을 들었다.
눈을 들어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름다운 노을이 거리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문득 다시, 살고 싶어졌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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