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룡 타계…코미디계 큰 별이지다] 바보 삼룡이, 천상의 무대로…

입력 2010-02-23 11:36:52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故 배삼룡.

故 배삼룡.

악극단서 시작한 무대인생 65년
전 세대를 울고 웃긴 천생 광대
말년 불운 잇따라 안타까움 더해


한국 코미디 1세대의 대표주자로 우리나라가 정치·경제적으로 암울했던 시기, 서민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웃음을 안겨 주었던 우리 대중문화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1960~70년대 흑백TV 시절, 그는 서영춘, 구봉서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며 한국 코미디계의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넘어지고 구르는 그의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는 미국의 명 코미디언 보브 호프가 무색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TV시절의 배삼룡씨만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희극연기의 뿌리는 그 이전 악극단 시절부터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배씨는 이듬해 유랑악극단 ‘민협’에 들어가 희극인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악극단의 스타로 명성을 떨치던 배씨는 1968년 MBC코미디언으로 방송에 데뷔했다. 당시의 많은 연예인들이 유랑극단을 거쳐 방송을 통해 전국에 이름을 날렸는데, 배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미 악극단 시절부터 비실비실, 위태위태한 독보적인 몸 연기로 명성을 떨친 배씨는 방송에 등장하자마자 ‘비실이’란 애칭과 함께 한국 최고의 스타로 자리잡았다. 방송사들은 그를 출연시키기 위해 납치전까지 벌여야 했을 정도였다.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린 배씨의 코미디 연기는 이후 후배 희극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출연한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고 코미디언의 꿈을 키우지 않은 지망생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이주일, 심형래에 이어 최근의 김현철에 이르기까지 배씨의 ‘바보연기’는 한국 코미디사에 굵직한 맥을 형성했다. 이윤석, 김태원 등의 개그를 보고 있자면 이미 40년 전에 ‘약골 캐릭터’를 선보인 배씨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락시간마다 자신들이 신나게 추어대는 ‘개다리춤’의 원조가 배삼룡이었다는 것을 알면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엇보다 그의 코미디는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는 데에 가장 큰 미덕이 있었다. 자녀 세대의 개그를 부모가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가 웃을 때 아이는 하품을 하는 요즘 개그 프로그램들과 달리 그의 코미디 연기는 어린아이부터 80대 노인까지 함께 웃고 울리는 마법같은 힘이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코미디사의 ‘국보’로 추앙받아 마땅한 배씨의 말년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결코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1980년 신군부는 그를 ‘연예인 숙정대상 1호’로 지목하고 방송 출연을 정지시켰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그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3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국했지만 더 이상 그를 위한 무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마저 실패하며 그는 좌절과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97년 악극 ‘눈물의 여왕’으로 재기하는 듯 했으나 지병인 ‘흡인성 폐렴’으로 2007년부터 힘겨운 투병생활에 접어들었다.

그의 불운했던 말년은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초상이다. 어둡고 힘들었던 시절, 그는 우리들에게 살 맛 나는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그가 웃을 때 우리는 웃었고, 그가 울 때도 우리는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힘들어 할 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이렇게 한국 코미디사의 큰 별이 또 하나 떨어졌다. 믿고 싶다. 진정 위대한 별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 다시 눈부신 빛으로 거듭나기 위해, 잠시 스러져갈 뿐이라는 것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 동아닷컴 박영욱 기자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