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27일 개막된 프로야구는 두산의 전신 OB가 명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 인기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동아 DB
□ 원년스타 3인-어린이회원
스물아홉살 프로야구 추억속으로
1982년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가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 국민들에겐 여가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화려하게 출범한 날이다.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원년 개막전. 7-7 동점인 10회말 MBC 이종도가 삼성 이선희를 상대로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야구의 꽃’ 만루홈런으로 피어난 프로야구는 곧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올해, 프로야구는 29년째를 맞는다. 공교롭게도 3월 27일, 같은 날에 개막전이 다시 열린다. 원년 이후 처음이다. 스포츠동아는 창간 2주년을 맞아 프로야구 원년 스타들과 당시 어린이 회원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원년 개막전의 드라마를 만든 MBC 이종도(58·현 유신고 인스트럭터)와 삼성 이선희(55·현 삼성 스카우트), 그리고 원년팬들이 만나고 싶은 스타로 꼽은 최초 우승팀 OB의 ‘학다리’ 신경식(49·현 두산 코치)도 함께 초대했다.
당시 프로야구로 꿈을 키운 어린이 팬들은 이제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의 나이로 성장해 대한민국의 허리세대로 자리잡았고, 이종도 이선희 신경식은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후배들을 발굴하고 키우고 있다. 이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여행을 떠난 듯 흥겹게 대화를 이어갔다.
프로야구 원년 어린이회원은 어느덧 30∼40대로 성장해 사회 각 분야의 중심이 됐고, 그라운드를 주름잡던 추억의 스타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됐다. 원년 어린이회원과 개막전 만루홈런의 두 주인공 이종도-이선희, 그리고 우승멤버 신경식 두산 코치가 그날을 추억하며 한 자리에 모였다. 번호 순서대로 김홍렬, 김승현, 신경식, 이종도, 김상아, 김우일, 강원정, 이선희, 황성연, 김환 씨.
팬들
오리궁둥이…다리찢기… 예전 선수들 개성이 그리워요
신경식
그시절 막무가내로 배워 가지각색
요즘은 기본자세 충실, 타격폼이 다 비슷해
이종도 :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사실 여기 올 때만 해도 막연히 원년 어린이 팬들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렇게 연세들을 많은 잡수신 줄 생각도 못했어요. 하하.
김홍렬(40·두산 정보통신 팀장) : 저희도 선수 시절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연세 드신 모습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는 원년 OB 어린이 회원이었고, 대학졸업 후 IT분야에 종사하다 5년전 두산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도 모두 베어스 회원이고 장인어른도 베어스 팬입니다. 현재 그룹 계열사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운영을 담당하는 팀장인데 영광스럽게도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개편작업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상아(42·브랜드 스토리텔링 컴퍼니 봄바람 실장) : 중학교 2학년 때 프로야구가 시작했는데 남동생 때문에 저도 삼성 팬클럽에 가입했어요. 캘린더에 장태수 선수 옆모습 사진이 있었는데 ‘고독한 카리스마’에 반했죠. 학교 다녀오면 항상 심장 두근거리며 경기를 보곤 했어요.
김우일(37·스포츠동아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 : 저는 85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뉴욕 메츠, 콜로라도 로키스 등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10년간 일했는데 서재응 김병현과 인연을 맺기도 했죠. 가끔씩 한국에 오면 서울이란 도시가 참 많이 달라졌는데 잠실구장만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김승현(39·작곡가 및 프로듀서) : 저는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 작곡도 하고 프로듀서도 하고 있어요. 대표가수는 브라운아이드걸스, MC The Max, 왁스, 양파, 김건모, 이승철 등이 있고, 최근 영화작업은 ‘식객 : 김치전쟁’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고향이 대구라 아버지는 삼성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라고 하셨는데 OB 회원이 됐어요. 특히 신경식 선수의 ‘다리찢기’는 동네야구할 때 유행이었죠. 어릴 때 사인 받으려고 야구장 밖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못 받았어요. 28년 만에 소원을 성취했네요.(이날 모두들 스타들의 자필 사인볼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신경식 선수의 다리찢기 수비는 어떻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럴 수 있어요?
신경식 : 요즘 그랬다간 병원 가야 돼요.(일동 폭소) 프로 들어오고 나서 우연히 시작했어요. 다리가 미끄러지면서 공을 받았는데 아프지가 않더라고요. 방망이 안 맞으면 일부러 다리찢고 그랬죠 뭐.
김승현 : 예전엔 선수들이 개성이 있었잖아요. 다리찢기 뿐만 아니라 김성한의 오리궁둥이 타법도 있었고, 선수마다 폼들도 다양했는데.
신경식 : 우리 때는 막무가내로 야구 배워서 그래요. 요즘은 이론이 정립돼 어릴 때부터 야구를 잘할 수 있는 기본자세를 잘 배우죠. 그러니까 요즘 은 다들 폼이 비슷비슷해요. 오히려 개성은 없어졌지만.
김홍렬 : 초창기에는 유니폼도 요즘 유행하는 스키니진처럼 달라붙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출범당시 6개 구단 엠블럼
팬들
개막전 만루홈런 주인공, 그 모습에 빠져 어린이회원 됐죠
이종도
은퇴할 나이 서른에 생긴 프로 첫 경기서 한방 ‘행운’
선희만 보면 아직도 미안하네
김환(35·록밴드 쟈니로얄 리더 겸 뮤직비디오 감독) : 그래서 요즘에도 개성을 가진 선수들이 좋더라고요. 개성이 있어야 팬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 때문에 해태 팬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야구선수를 했는데 서울로 전학 오면서 그만뒀어요. 85년 개막전 때 이순철 선수에게 꽃다발을 준 기억도 나네요.
강원정(프로덕션 KIMHWAN-ART.COM 매니지먼트) : 저는 록밴드 드러머 출신인데 김환씨와는 동료로 만나 오랜 만남 끝에 결혼까지 했어요. 나이는 공개하고 싶지 않아서…. 전 두산팬이에요. 두 팀이 맞붙으면 우린 앙숙으로 변해요. 경기장에 갈 땐 그날 분위기 봐서 상대 응원석에 앉고요. 물론 다른 팀과 경기하면 서로를 응원해주죠. 작년에 두산이 플레이오프에서 지면서 한국시리즈 때는 저도 KIA를 응원했어요.
황성연(36·GS칼텍스 광고팀 과장) : 아홉 살 때였는데 원년 개막전을 TV로 봤어요. 지금 여기 계신 5번타자 이종도 선수가 만루홈런을 치는 모습이 너무 강렬해 야구에 빠지게 됐죠.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는데, 회원 가입하면 점퍼와 가방도 줬어요. 당시 골목에서 야구하다 동네 유리창 다 깨고…. 어린 시절 우상으로 여기던 분들에게 제가 명함을 드릴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을 못했어요. 선수 시절보다 원숙하고 세련되게 나이 드신 모습이 더 좋습니다.
이종도 : 원년 개막전 때 저는 5번이 아니라 6번타자였어요. 하하. 오래 된 일이라 헷갈리셨나 보네. 백인천 감독 겸 선수가 4번, 유승안이 5번…. 서른 살에 프로야구가 생겼는데 실업야구 시절이라면 은퇴할 나이였죠. 원년에 제 위로는 윤동균 김우열 선배밖에 없었어요. 당시 은행 대리였는데 안정된 직장을 버린다고 주위 선배들이 만류했어요. 저도 많이 망설였죠. 그런데 행운이 나에게 와서 만루홈런도 치고. 그 얘기만 나오면 항상 이선희한테 미안해요.
이선희 : 프로야구 흥행의 기폭제가 됐죠. 만루홈런을 안 맞을 수도 있었는데…. 초반에 우리가 크게 앞서고 있었잖아요. 선발투수 황규봉 선배가 다 던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시 삼성 단장이던 김동영 이사가 덕아웃까지 내려와 서영무 감독한테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앞서느냐. 프로야구 죽이려고 그러느냐”면서 “점수 더 내지 말라”고 압력을 넣더라고요. 점수는 내지 않고 상대에게 야금야금 따라잡혀 동점이 됐죠. 날씨가 쌀쌀했는데 몸을 풀었다, 쉬었다를 반복하다 등판하다보니 컨트롤이 안 되더라고요.
팬들
개막전-KS 최종전 만루홈런 허용, 원년 비운의 투수로 기억되는데…
이선희
내가 ‘비운아’라고? 천만에! KS 최초의 승리투수인데 뭘…
지금까지 현장 지키는 ‘행운아’
황성연 : 개막전도 그렇지만 원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도 OB 김유동 선수에게 만루홈런을 맞아 비운의 투수로 얘기되잖아요.
이선희 : 전 비운의 투수가 아니라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사실 최초 한국시리즈 승리투수 주인공은 접니다. 원년에 1차전은 비기고 2차전 승리투수가 됐으니까. 그런 얘기는 안 나오더라고.(일동 폭소) 프로에서 선수로, 코치로, 스카우트로 지금까지 한번도 안 쉬고 일하고 있어요. 이만 하면 행운아죠. 그런데 삼성이 두산하고는 한국시리즈에서 안 붙었으면 좋겠어요. 2001년 한국시리즈 때 1군 투수코치였는데 1차전에 앞서 원년 한국시리즈 만루홈런 얘기만 묻더라고요. 도망가고 싶어 혼났어요.(일동 웃음)
김상아 : 기억에 남는 팬이 있어요?
이선희 : 많죠. 요즘에는 밸런타인데이다, 화이트데이다 해서 사탕이나 초콜릿을 선물하는 팬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팬레터와 종이학이 많았어요.
이종도 : 아유∼. 말도 마. 팬들 마음은 고마웠지만 종이학은 하도 많이 받아서 사실 처치 곤란이었어요. 종이학 선물이 유행이던 시대니까.
김환 : 과거에 비해 프로야구가 많이 달라지고 발전했죠?
신경식 : 저뿐만 아니라 구천서 구재서 박종훈 등 후배들은 경기 끝나면 선배들 장비까지 다 묶어서 둘러메고 낑낑거리면서 버스를 탔어요. 그 사이 내 모자는 누가 벗겨가고.(일동 폭소) 요즘 선수들은 그런가요? 자기 것만 챙기면 되죠. 구단직원들이 짐을 다 들어주니까.
이종도 : 초창기 때는 말이 프로지 아마추어나 다름없었죠. 이제 우리나라도 올림픽이나 WBC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시스템도 프로화됐지만. 아무튼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0년 가까이 흘렀는데 우리를 아직도 기억해주시는 팬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네요.
팬들 : 어릴 때 우상으로 여기던 분들을 직접 만나 뵙게 돼 꿈만 같아요. 어릴 때 기억은 평생 가는 것 같아요. 지금 선수들과 어린이 팬들도 언젠가는 우리들처럼 나이가 들겠죠?
● 추억을 안주삼아…2차까지 OK!
※ PS : 프로야구 원년 스타와 어린이 회원들의 만남은 3월 16일 저녁 7시에 이뤄졌다.
모두들 생업으로 바빠 퇴근 시간에 맞춘 것. 당초 원년 6개구단(OB, 삼성, MBC, 롯데, 해태, 삼미) 어린이 회원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인천에 사는 삼미팬과 부산에서 올라오기로 약속한 롯데팬이 “갑자기 회사일이 생겨 자리를 함께할 수 없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스포츠동아 인터뷰룸에서 시작된 대화는 늦은 저녁식사 자리로 이어졌고, 삼겹살과 소주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10시쯤 됐을까. 신경식 코치가 불을 질렀다. “기분도 좋은데 한잔 더 하시죠.” 예정에도 없던 2차, 맥주집으로 GO!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이들은 야구를 안주삼아 밤늦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진행·정리|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