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복제가 근절되는 그날까지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게임이 정식적인 경로로 유통되지 않던 시절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게임을 즐겼던 게이머들이라면 청계천, 용산 등지의 전자 상가를 찾아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디스켓에 게임을 복사해서 즐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의 전자 상가에서 저런 복사 게임을 취급하는 매장 역시 대단히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게임 매장에서 '게임 복사, 한 장에 OO원' 식의 광고 문구를 버젓이 걸어놓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이런 모습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않고, 게임을 쉬게 구입할 수 있는 유통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기에 생긴 현상이다. 하지만 저작권 보호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를 않고, 게임의 정식적인 유통로가 확보된 현재에도 이러한 모습은 계속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를 막기 위한 복제 방지 기술 개발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단순한 패스워드 시스템에서 최근 널리 활용되고 있는 온라인을 통한 정품 인증 방식까지 말이다.
* '암호지'를 기억하십니까?
현재는 비디오 게임이건 PC 패키지 게임이건 불법 복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비디오 게임의 저장 매체로 롬팩이 사용되던 8비트, 16비트 기종 시절만 하더라도 불법 복제는 PC 게임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기판 형식으로 공장에서 조립되어 출시된 롬팩을 복사하기 위해서는 기판을 조립할 수 있는 공정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며, 게이머 개인이 이런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이들 롬팩에 담긴 게임을 불법 복사해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기기들이 존재했지만 가격적인 문제와 편이성의 문제 등으로 인해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PC 패키지 게임의 경우는 원본 디스켓의 데이터를 데이터가 기록되지 않은 공 디스켓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편리함 때문에 게이머들이 매우 간단하게 불법 복제를 할 수 있었던 것. 비디오 게임의 불법 복제에 있어서 게이머는 수동적인 소비자에 불과했지만, PC 패키지 게임의 불법 복제에서는 게이머들이 복사를 직접 시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PC 게임 개발사들은 불법 복제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 중 가장 널리 사용된 방법으로는 '암호지'라 불리는 패스워드 시스템을 게임에 도입한 것이다. 게임을 실행하기 전에 특정 문자열을 입력한다거나, 해당 좌표에 맞는 색을 선택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정답을 유도하고, 답을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게임 실행을 중지시키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암호지' 자체를 복사기에 복사하거나 때로는 손으로 일일이 다 받아 적는(심지어는 그림까지 그리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에 의해 무력화 됐다.
1992년 국내에 발매된 소프트액션의 슈팅 게임 '폭스레인저'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의 불법 복제 방지책을 내놓기도 했다. 게임의 인스톨 횟수를 5회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후부터는 게임이 인스톨 되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은 최근 발매된 스트리트 파이터 4의 PC 버전이나 배틀필드: 배드컴퍼니 2의 PC 버전에서도 채택되는 등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된 기술의 질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한 기본적인 컨셉이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 CD, DVD, GD, 블루레이 디스크의 공통점은?
때로는 게임을 담고 있는 매체 그 자체가 불법 복제를 방지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이야 CD가 매우 흔하디 흔한 기록 매체이지만, 게임의 기록 매체로 CD가 처음 사용되던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CD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CD를 읽을 수 있는 드라이버도 흔치 않았으며, 이를 읽어내더라도 660MB에 달하는 대용량을 담아낼 기록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로 사용되던 하드 디스크의 용량이 500MB에도 못 미쳤던 것을 감안한다면 CD는 그 용량만으로도 불법 복제로부터 안전한 매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CD의 이런 안전함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드 디스크의 용량 발달과 CD롬 드라이브의 보급으로 인해 CD가 가진 용량과 매체의 생소함이라는 강점이 퇴색된 것이다. 또한 크래커들은 CD에 담긴 게임 데이터에서 음악이나 음성, 동영상 파일을 삭제한 이른바 '립' 파일을 제작해 유포하기 시작하면서 CD의 보안성은 사라지게 됐다.
플레이스테이션과 세턴 등 CD를 활용한 32비트 게임기들은 PC의 경우와는 조금은 다른 경로로 보안이 뚫리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들 게임기에 사용된 게임 CD에는 매체 자체에 정품 인식 코드가 숨겨져 있어 게임을 불법으로 복사하더라도 게임기에서 인식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리 복사를 하더라도 정품 인식 코드는 복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방법은 상당히 안전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드칩이 등장하면서 이런 보안 역시 그 빛을 잃게 된다. 흔히들 복사칩이라 부르던 모드칩은 애초에는 게임의 국가 코드를 해제하기 위한 용도로 개발됐지만, 이후에는 게임의 정품 코드를 해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드칩의 등장은 CD와 CD 라이터의 보급과 맞물려 게임기에도 불법복제 바람을 몰고 왔다. 또한 당시 국내에 보급된 플레이스테이션, 세턴 같은 비디오 게임기들은 정식으로 유통된 물건이 아닌 소위 '보따리 상'들에 의해 유입된 물건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를 제지할 명분이 없던 것도 불법 복제의 범람을 확산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이후 드림캐스트의 GD(Giga Disc),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DVD, 플레이스테이션 3에서 사용 중인 블루레이 디스크 등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으며 모두들 CD와 마찬가지로 매체의 생소함과 대용량을 무기로 보안을 자신했다. 하지만 GD의 경우는 기기의 헛점을 이용한 부팅 CD의 등장으로, DVD의 경우는 CD와 같은 이유로 보안이 허물어졌다.
아직까지 보안이 뚫리지 않은 매체는 플레이스테이션 3의 블루레이 디스크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한 장에 50GB가 넘는 대용량을 담고 있으며, 매체를 읽어낼 수 있는 드라이버의 보급 속도가 매우 더딘 것이 현재 블루레이 디스크가 보안을 자신하는 이유다.
또한 플레이스테이션3는 이와 함께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된 펌웨어를 제공하며, 신작 게임의 경우 펌웨어의 버전이 최신 버전이 아니면 아예 실행이 되지 않도록 막아내고 있다.
* 절반의 성공, 온라인 인증
최근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보안 방식으로는 온라인을 통한 정품 인증 방식을 꼽을 수 있다. 게임뿐만 아니라 MP3 등 디지털 콘텐츠의 전반에 걸쳐 널리사용 되고 있는 온라인 보안 시스템을 대표하는 단어라면 DRM(Digital Right Management)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DRM이란 개개의 디지털 콘텐츠 내부에 정품 인증 시스템을 삽입시켜,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해당 콘텐츠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인증을 통한 보안 시스템의 대표라면 스팀(Steam)을 꼽을 수 있다. 하프라이프 시리즈로 유명한 밸브에서 개발한 스팀은 게임 구매자의 계정으로 스팀에 접속하지 않으면, 게임을 실행할 수 없도록 하는 기능을 하는 시스템이다.
종종 스팀 계정 등록을 우회해서 게임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의 복제 방식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구동한 게임으로는 멀티 플레이를 즐길 수 없다. 특히 최근 게임의 흐름이 온라인을 통한 멀티 플레이 콘텐츠를 얼마나 포함하고 있느냐가 게임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어, 불법 복제를 통해 멀티 플레이 콘텐츠가 차단된 게임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게임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또한 스팀은 PC 패키지 게임의 보안 장치 기능은 물론 멀티플레이를 지원하고, 게이머들 사이의 소통을 지원하며, 다운로드 방식의 게임 판매까지 지원하고 있다. 초기에는 인증 방식의 번거로움과 잦은 오류 및 튕김 현상 등으로 인해 외면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개선 작업을 거쳐 최근에는 그 편리함과 충실한 보안 기능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일견 완벽해 보이는 이런 시스템도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멀티 플레이 요소를 애초에 갖추고 있지 않은 게임에 대해서는 그다지 메리트를 보일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보안 컨셉 자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로는 불법 복제 사용자를 차단하기 위해 여러 겹의 방어장치를 구현하다 보니, 정작 정품을 구매한 사용자들이 불편함을 겪는 사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최근 일어난 UBI 소프트의 '어쌔신 크리드 2' 발매에 얽힌 소동이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UBI 소프트는 자사의 신작 액션 게임 '어쌔신 크리드 2'의 PC 버전을 발매하며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게임 플레이 중 지속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정품 인증을 실시하는 방식의 DRM을 게임에 삽입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PC에서는 게임을 실행할 수가 없으며, 설령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는 PC라 하더라도 회선이 불안정하다면 게임이 멈춰버린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UBI 소프트의 보안 서버는 수시로 다운되기까지 해 게이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제작사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게임을 즐길 수 없는 사태가 자주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한 스팀도 서비스 초기에 겪었던 문제며, 스팀이 이를 극복 했듯이, UBI 소프트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극복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을 통한 정품 인증이 언제든 이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점이다.
* 불법복제와 이를 막기 위한 전쟁,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시대가 변하면서 게임을 개발하는 기술도, 게이머들이 게임을 평가하는 안목도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불법 복제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게이머들의 인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사를 하고자 하는 측과 이를 막고자 하는 측의 유쾌하지 못한 경쟁을 통해 기술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계기를 통한 기술의 발전은 멈출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완벽한 보안 기술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가장 확실하고 빠른 보안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의 인식 전환이다.
김한준 게임동아 기자 (endoflife81@gamedong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