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월드컵 ⑪ 골 세리머니의 모든 것] 오노 페러디, 반지키스…사연많은 골 세리머니

입력 2010-05-23 15: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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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위한 반지키스·허 감독 위한 ‘아기 어르기’
2002년 오노 패러디 세리머니는 ‘풍자의 압권’
어느 스포츠든지 가장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더불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선수들이 온 몸을 이용해 펼치는 동작 또한 팬들에게는 큰 볼거리다.

축구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역시 골을 성공시켰을 때.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볼이 골 망을 출렁이는 순간, 온 세상을 가진 듯한 기분에 취한 선수들은 각자만의 독특한 세리머니로 모두를 즐겁게 한다. 처음에는 동료들과 얼싸안고, 관중석 쪽으로 달려가 두 팔을 벌려 환호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90년대 이후 월드컵을 기점으로 천편일률적이던 세리머니도 꾸준히 진화를 거듭했다.

4년마다 한 번씩, 전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32개국이 펼칠 각본 없는 드라마. 이번 남아공 무대에서는 어떤 세리머니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 가족사랑

한국 축구에서 ‘반지키스’ 세리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때는 2002한일월드컵 직전 스코틀랜드와 평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은 안정환(다롄스더). 모든 연예인이 최우선 순위로 꼽는다는 화장품CF 모델로 활동할 정도로 잘 생긴 조각 같은 외모, 곱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왼손 약지에 곱게 끼운 결혼반지에 키스를 하던 안정환의 골 세리머니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격한 감동을 부인 이혜원씨를 향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최고의 장면이었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미남 골게터 라울 곤잘레스(레알마드리드)도 반지키스로 유명하다.
마드리드 출신 패션모델 부인 마멘 산츠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둔 라울은 소속 팀이든, 대표팀이든 득점에 성공하면 동료들과 얼싸안기 전에 무조건 반지에 입을 맞춘다. 항간에서는 안정환의 액션을 놓고 라울의 그것을 따라했다는 얘기도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이나 가족 사랑에 대한 표현 방식은 모두 비슷한 듯 하다.

94미국월드컵 때 나온 브라질 베베토의 세리머니도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회 기간 중 출산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베베토는 골을 넣은 직후 터치라인으로 달려가 두 팔을 가운데로 모아 좌우로 흔드는 일명 ‘아기 어르기’ 세리머니로 팬들을 즐겁게 했다.

잉글랜드의 전 캡틴 존 테리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도 베베토의 모션을 종종 따라했는데 그래서인지 ‘아기 어르기’는 오직 유부남들의 전유처럼 비쳐졌으나 한국에서는 이근호(주빌로 이와타) 또한 쌍둥이 외손자를 얻은 허정무 감독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를 따라해 허 감독의 큰 웃음을 이끌어냈다. 대표팀 캡틴 박지성(맨유)이 주도했던 그라운드를 엉금엉금 기는 세리머니도 ‘아기 어르기’의 일종이었고, 대상은 역시 허 감독이었다.


●풍자와 해학…추모와 우아함까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당시 김동성이 미국 대표 안톤 오노의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인해 억울하게 금메달을 내준 모습을 재연한 ‘오노 세리머니’도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다.

2002한일월드컵 조별예선 미국과 2차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안정환은 코너 플래그로 달려가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선보였고, 이천수가 달려와 안정환을 툭 치곤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일부 외신은 안정환의 스케이트를 빗대어 ‘개가 다리를 들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라고 썼지만 당시 미국 벤치는 일찌감치 진짜 의미를 알고 있었음에도 대구월드컵경기장을 가득 채운 붉은악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항의를 할 수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때론 소품도 등장한다. 2006독일월드컵에서 에콰도르의 이반 카비에데스는 코스타리카전 종료 직전 득점한 뒤 바지춤에서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여기에 숨겨진 사연이 뭉클했다.

대회 1년여 전, 트럭 사고로 숨진 대표팀 후배 테노리오가 즐겨 한 세리머니였던 것이다. 현지 신문들은 카비에데스의 행동을 놓고 ‘우리는 다시 테노리오를 볼 수 없지만 카비에데스에 의해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고 썼다.

축구 외에 선수들 각자가 좋아하는 취미를 담은 것도 있다.

아일랜드의 로이 킨은 특유의 텀블링과 함께 기관총을 쏘는 듯한 시늉을, 이탈리아의 질라르디노는 자신의 골이 예술적이었음을 알리려는 듯, 무릎을 꿇고 조용히 바이올린을 켜는 우아한 동작을 취했다.

호주의 케이힐은 열혈 복싱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골을 넣으면 무조건 코너 플래그에 원투 펀치를 꽂아 넣곤 멋쩍은 미소를 짓기로 정평이 났다. 항간에서는 복싱 세리머니가 호주의 마스코트 캥거루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이 서로 싸울 때 앞발을 들어올려 복싱을 연상케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을 케이힐이 따라했다는 분석도 내놓지만 기성용(셀틱)이나 토고 아데바요르(맨체스터시티)가 두 손을 모으고 깡충깡충 뛰는 것보다 비슷하진 않다.


●종교를 위해, 토속 의식도

3월 국내 축구계에는 때 아닌 ‘기도 세리머니’ 논란이 일어났다. 조계종이 대한축구협회에 ‘대표팀 경기 중 골 세리머니에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지 말라’는 요청을 한 것. 이에 허 감독은

“선수 자율에 맡길 사안일 뿐, 강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정치색 혹은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 상의를 탈의하는 정도를 금하고 있을 뿐이어서 월드컵에서 기도 세리머니는 심심치 않게 펼쳐질 전망이다. 주로 기독교 신자들이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데 박주영(AS모나코), 이영표(알 힐랄), 김동진(울산) 등이 크리스천 선수들이다.

국내에서는 드물지만 유럽이나 남미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은 가톨릭을 종교로 가진 선수들이 펼치는 ‘성호 긋기’ 세리머니다. 주로 북중미 선수들에 몰려있다. 뿐 아니라 브라질 공격수 카카(레알 마드리드)는 예수를 경외하라는 의미로 하늘을 양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프리카 선수들의 의식도 독특하다.

카메룬, 나이지리아 등 역대 월드컵에서 꾸준히 좋은 성과를 올려온 아프리카 선수들은 마치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인상을 주는 이색적인 춤을 추며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곤 한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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