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드라마캐릭터열전]뻔한 신데렐라를 거부한 ‘저거’, 김인숙

입력 2011-04-04 14: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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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재벌가의 며느리가 됐으나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신데렐라 이야기의 재탕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만했다.

인턴사원이 고질병에 시달리던 재벌그룹 회장의 생명을 구하고, 그 덕분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재벌가 둘째 며느리 자리를 꿰찼다. 여기까지는 사극이나 현대극이나 결혼으로 신분상승 꿈을 이루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여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도 없고 유명 방송인도 아닌 주제에 재벌가의 둘째 며느리가 돼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보통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로열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 분)은 분명 재벌 2세와의 사랑을 꿈꾸던 또 다른 신데렐라 캐릭터로 보인다.

하지만 "집안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원칙에 위배된 미천한(?) 신분으로 재벌가의 둘째 며느리가 된 그녀는 대한민국 상위 1%의 재력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시어머니 공순호(김영애 분)에겐 그저 아들의 성적 노리개일 뿐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하나 뿐인 아들로부터 어머니라는 자리를 포기해 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그녀가 이름이나 호칭 대신 사물을 지칭하는 대명사 "저거!"로 불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묶인 재벌가의 혼맥(婚脈) 구도에 어울리지 않는 신분의 그녀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 세계의 상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인숙'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K'라는 이니셜로 불리고, 시어머니를 '회장님'으로 불러야 하는 그녀가 수면제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없을 정도로 불면증과 신경쇠약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자업자득이라 할 만하다.

가족 그 누구에게도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녀는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진 고사목(枯死木)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밟아도 꿈틀거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속내를 숨긴 그녀는 대한민국 상위 1%의 재력을 자랑하는 JK그룹의 회장이자 시어머니의 거대한 경제적 권위에 짓눌린 듯, 그렇게 18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왔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양과 달리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버섯 같은 존재였다.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나무인 줄 알았으나, 여린 바람 한 줄기에 수직 낙하할 것 같은 봄꽃 같은 가녀림 속에 질경이의 드센 생명력을 간직한 여자였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길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그녀를 독성 강한 잡초로 만든 것이다.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던 18년의 세월 동안 그녀의 내면에 쌓인 시댁 식구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남편의 재산에 대해 그 어떤 권리 행사도 하지 않겠다는 결혼 당시의 약속 때문에 남편이 죽은 뒤 JK그룹의 안가인 '정가원'에서 빈손으로 쫓겨나야 할 상황에 처한 김인숙. 그녀가 거액의 위자료로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친권을 빼앗으려는 시어머니에게 저항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녀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공순호 회장은 그녀의 저항을 "밟으면 열과 성을 다해서 꿈틀거리는 게 성의인 게야"라는 말로 받아 넘기지만, 그녀는 결코 꿈틀거리는 벌레가 아니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재벌가의 자제들에게도 후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하다. 피 말리는 경쟁 구도 속에서 김인숙은 투명인간으로 살아온 18년 동안 축적한 그녀만의 방식으로 JK그룹에 맞서기 시작한다.

사랑 하나만으로 시작한 것 같은 결혼생활 동안 그녀에게 허용된 유일한 외출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이라는 명분으로 허용된 사회봉사 활동이었다. 고아원을 중심으로 한 그녀의 봉사 활동은 JK가의 구성원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은 철의 여인 같은 공순호 회장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이었다.

그녀는 이미 돈은 길고 권력은 짧지만 그래도 그룹 경영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권과의 연결 고리 유지의 필요성을 느끼는 재벌가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봉사 활동을 빌미로 맺게 된 유력 대권 주자의 부인과 돈독한 관계를 이용해 자신을 벌레 취급하는 공순호 회장의 마음을 돌려놓을 줄 아는 여자가 바로 김인숙이었던 것이다.

내부가 드러나지 않는 반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성과 같은 JK그룹의 대저택 '정가원'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은 매 상황에 맞게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 표정만큼 다채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초점 없는 눈빛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은 기본이고, 한없이 다정스럽게 웃는 표정에 싸늘함과 경멸을 함께 담고 있는 비웃음은 그녀의 본색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는 사람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함과 사악함으로 상대방을 쥐락펴락하는 그녀에게서 선의(善意)를 읽기란 힘든 일이다.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 김인숙은 구성그룹의 장녀라는 배경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큰동서 임윤서(전미선 분)의 무릎을 꿇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최고 상류층의 사교장인 JK클럽의 사장에 오른다. 타고난 재력에서 비롯한 권위로 '무례' 운운하며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던 임윤서를 '온실공주'라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사람은 적당히 밟혀봐야 근력도 생기고, 미친 듯이 뛰어봐야 폐활량도 늘어난다"고 조롱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제 더 이상 'K'로 불리던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미천한 신분으로 재벌가에 시집가서 핍박받는 피해자 같지만, 어느 틈에 재벌가를 상대로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괴물 같은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녀를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녀는 세대 별로 구분돼 있으나 누구나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기도실'에 들어가 종교적으로 자신을 구원한다. 또 대한민국 최고 상류층만 출입할 수 있는 JK클럽에서는 그동안 준비했던 경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수시로 기도실을 드나들며 기도하는 순결한 성직자와 JK가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는 준비된 CEO 가운데 어느 것이 그녀의 실체인지 알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녀로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행적'도 그녀를 미스터리한 인물로 만든다. JK그룹의 지주사가 될 JK클럽의 사장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임윤서가 뒤를 캐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미군을 상대했던 양공주 김마리였을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드러난다.

JK클럽 사장 취임식 현장에서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흑인 혼혈인의 존재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실체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그녀의 후원을 받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었다가 공순호 회장에 의해 금치산자로 몰리게 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JK그룹의 변호사로 이직한 한지훈(지성 분)과의 관계도 그녀의 과거를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사진제공=MBC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재벌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건너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김인숙은 그 벽을 넘어 재벌 총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JK그룹의 전 회장과 무슨 관계였으며, 그녀가 어떻게 JK가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를 증오와 복수의 DNA가 새겨진 괴물로 만든 것이 18년 동안 JK가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아온 서러움이 아니라 그녀의 과거를 둘러싼 의문이라는 점이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핍박과 설움을 호소하며 연민을 구하는 그녀의 표정은 철저한 가면일지 모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JK클럽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하는 순간 혹은 그 이전부터 준비된 그녀의 치밀한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꽃다운 나이에 여고를 중퇴하고 짐승 같은 삶을 강요당하면서 지워진 김마리라는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기꺼이 김인숙이라는 괴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는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한다.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김인숙이 무서운 '괴물'로 인식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창백한 얼굴 표정과 한없이 가녀린 몸짓 속에 세상을 향한 저주와 탐욕의 왜곡된 몸부림을 감추고 있는 그녀는 어쩌면 너무 많이 가진 자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만들어낸 상상의 괴물일지 모른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순결함과 추악함이 교차하는, '천사의 가슴을 지닌 악마 김인숙'을 주목하는 이유가 아닐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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