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새콤한 국물+쫄깃한 면발+아삭한 김치…“후루룩 후루룩” 목이 쑥쑥 빨아들이네

입력 2011-10-1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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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한 상호 하나 없는 국수집에 홀린 듯 들어가 열무김치국수에 동동주 한사발 걸치니 가을볕 더위에 맺힌 땀이 절로 식는다. 이 곳은 동해 남부를 여행하는 라이더들에게 좋은 식사 포인트가 되고 있다.

13. 사천~울산 <하>


■ ‘인디언 서머’ 날려준 시원한 ‘열무김치국수’

집요하게 오라 손짓하는 소매물도
‘가보고 싶은 섬’이라니 가보자, 26㎞ 온 길 되돌아

거친 바위섬, 자전거는 두고가란 말에 생고집
이고지고 생고생…20분도 안 될 거리 1시간20분 걸려
관광객 “대단하다” 감탄사에 속만 시커멓게 타


집단가출 전국일주 자전거 여행에 있어서 ‘어떤 코스를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불가피하게 첨예한 갈등의 요소를 안고 있다. 바퀴는 둥글어서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막상 갈림길 앞에 서면 예외 없이 이리 갈까, 아니면 저리 갈까 오만가지 생각으로 심경이 복잡해지고 만다.

허영만 화백을 필두로 집단가출 멤버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대한민국 영토 외곽선에 단절 없는 자전거 바퀴자국을 새기겠다는 것. 그러나 들쑥날쑥 복잡한 해안선과 수많은 섬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섭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1년간 2000km 남짓 페달링으로 이어온 궤적은 아름답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들을 점점이 연결한 선이지만 돌이켜보면 택하지 않은 길, 어쩔 수 없이 버린 길들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가보고 싶은 섬’베스트10에 랭크된 소매물도는 그 명성만큼이나 지형이 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정상 부근에 자전거를 세우고 땀을 식히는 대원을 지나가는 관광객이 동물원의 원숭이인냥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



● ‘집단가출’ 멤버 유혹한 소매물도…자전거 고집하다 ‘생고생’

거제도 동쪽 14번 해안도로를 달려 지세포 거제요트학교 옆에서 때늦은 가을 모기에 시달리며 야영하던 밤, 소매물도는 집요하게 우리를 유혹했다.

마산 창원의 내륙 코스 대신 거제도를 돌고 거가대교를 통해 부산으로 진입하려는 계획 하에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를 지날 때 가을 햇살 가득한 쪽빛 남해의 수평선 위에 한 송이 작은 꽃인 양 함초롬하게 떠있던 소매물도는 이미 버린 길에 속한 곳이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거제도 남쪽 끝 저구항에서 배를 타야하는데 이미 낮에 저구항을 지나온 것이다. 그런 소매물도가 이튿날 달릴 옥포∼을숙도∼부산 코스를 검토하기 위해 펼쳐놓은 지도 위에서 묘하게 자꾸만 눈에 밟힌다.

앞으로 갈 길도 먼데 지나온 길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과 그래도 ‘가보고 싶은 섬’ 베스트10에 랭크되어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 지척인데 그냥 지나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이라는 의견이 나뉘어 논쟁 끝에 결국 들르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아침 26km 거리를 되짚어 돌아간 저구항. 매표소 직원이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우리들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한다. “소매물도는 아주 작은 섬인데다 지형이 험해서 자전거 탈만한 곳이 없어요. 자전거는 두고 갔다 오세요.”

자전거 여행 중인 우리들에게 자전거를 포기하라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어코 갖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매표소 직원은 수차례 만류 끝에 “고생을 사서 하겠다는 거냐? 나중에 후회해도 나는 모른다”고 혀를 끌끌 차며 표를 내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쯤에서 매표소 직원의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따랐어야 했다. 40여분 뒤 소매물도에 상륙하자 이번엔 관광객이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돕는 아저씨가 “여기에 자전거를 가져오다니 제 정신이냐?”는 지청구와 함께 선창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맨몸으로 다녀오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했던가? 일행 중 누구도 소매물도에 와본 적이 없는지라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자전거 놔두고 가라는 말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

매물도 선착장 정면의 가파른 계단은 척 보기에도 자전거로 오를 수 없는 길이었는데 다행히 왼쪽으로 적절해 보이는 오솔길이 뻗어있어 앞뒤 잴 것 없이 기세 좋게 올라붙었다.

소매물도 북동 해안의 우회로인 이 길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1km도 안돼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와 울창한 나무들로 인해 더 이상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자전거를 들고 메고 끌고 가면서도 가끔 나타나는 짧은 라이딩 가능 구간들은 조금만 더 견디면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1. 우연히 들른 국수집에서 만난 자전거동호인들과 좋은 인연으로 기억될 추억 한장을 남기고 있다.

2. 배 한켠에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다름 아닌 연인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였던지라,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에 대원들이 머쓱한 미소을 짓고 있다.



그 흔한 상호 하나없이 항아리에 거칠게 쓴 국수
절로 느껴지는 내공에 홀린 듯 들어가니 이미 만석

열무김치 따로 국수 따로 세팅
나그네 입맛대로 김치 커팅은 셀프서비스
한끼 때우러 갔다 호강한 입 “음! 바로 이맛이야”

나무가 빽빽하고 가파른 산길을 자전거를 들쳐 업고 오르는 것은 굉장한 노동이어서 그야말로 땀으로 목욕을 하며 능선 꼭대기에 이르렀는데 아래쪽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내려가 보니 매물도 선착장 정면에서 오르는 계단길과 합류지점이 아닌가. 허탈!

선착장으로부터 걸어서 20분도 안되는 지점까지 자전거를 무리하게 끌고 우회로를 택한 우리는 1시간 20분 가까이 걸린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는 절대 못 가니 놓고 가라던 사람들의 만류가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매물도는 길의 90% 이상이 거친 바위와 계단으로 이뤄져 자전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체력과 실력이 출중해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온 줄 아는 관광객들은 대단하다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낸다.

결국 소매물도 풍경의 핵심으로 일컬어지는 등대섬까지 건너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으로 기대하던 매물도 라이딩은 허탈하게 막을 내렸다.

거제도의 나머지 해안도로를 다 달리고 거가대교(거가대교는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차량으로 이동)를 통해 을숙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전에 소매물도에서 고생한 탓에 기진맥진이었다.


● 31번 지방도로 ‘국수집’의 내공 높은 잔치국수와 열무김치국수

이튿날 새벽같이 해운대를 지나 달맞이고개를 넘는다. 기상청의 바다 구분에 따르면 부산까지는 남해, 울산부터는 동해. 이제 집단가출 자전거 일주팀은 남해안을 빠져나와 동해안을 코앞에 두고 있다. 송정, 기장, 대변, 월내 서생을 차례로 통과하며 GPS 나침반에 나타난 진행 방향이 확실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자 감회가 새롭다.

자동차들은 부산∼울산간 65번 고속국도나 14번 국도를 주로 이용하므로 해안도로는 비교적 한적했고 또한 가을볕이 좋아 자전거로 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닷가에 바짝 붙어 달리는 31번 지방도에는 가을날의 라이딩을 즐기는 부산 울산지역의 자전거동호인 그룹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진하를 20여km 남겨둔 지점 도로변에서 몹시 허름한 국수집을 발견했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가게 앞에 포개어 쌓은 항아리에 흰색 페인트로 거칠게 ‘국수’라는 글자를 써놓은 것에서 뜬금없이 내공이 느껴져 점심을 때우기 위해 들어갔다.

이 집의 주력 메뉴는 잔치국수와 열무김치국수. 새벽부터 가을볕에 땀깨나 흘린 터여서 열무김치를 주문했는데 열무김치와 국수가 따로 나온다. 게다가 김치는 자르지 않은 상태로 서빙 된다. 손님이 가위로 적당한 길이로 잘라 국수 위에 얹어먹는 독특한 시스템. 새콤하고 차가운 국물은 목넘김이 좋았고 적당히 찰진 국수는 부드럽게 씹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테이블마다 꽉 차 있는 것으로 보아 근동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집인 듯했는데, 잠시 후 한 무리의 자전거 동호인들이 왁자지껄 들어온다. 이미 부산 울산 지역의 자전거동호인들 사이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이름이 나있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부산에서 진하해수욕장까지 다녀오는 길이라는 한 라이더는 “시원한 열무김치국수도 좋지만 이곳 바다에서 많이 나는 멸치로 국물을 낸 잔치국수도 압권”이라고 귀띔한다.

소문을 듣고 찾아간 곳이 아니라 이렇게 길 위에서 문득 만나는 내공 있는 음식은 나그네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발 열무김치국수로 기운을 차린 일행은 날듯이 질주해 오후 6시에 울산에 닿았다.

글|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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