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내를 잃은 슬픔, 하지만 가슴에 더 큰 구멍을 내고 만 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비열한 현실의 벽. 화제의 드라마 ‘추적자’에서 ‘손현주=백홍석’은 그 절망을 넘어,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사진제공|SBS
좌절·절규…억울한 가장의 현실적 스토리
딸도 아들도 저도 울화통 터질때 많습니다
서민연기 ‘본좌’ 오른 비결요?
5만원 들고 새벽까지 술잔 나누던 시절
곱창집 알바하면 몇만원 벌던 시절…
그때 떠올립니다
후반부 반전 있냐고요?
그건, 높으신 분들 몫…
전화 한 통이면 되잖아요
“백홍석!”
환하게 웃으며 선배 김미숙이 대기실로 들어섰다. 진지하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화색이 된 손현주는 이내 달려가 김미숙을 우정으로 포옹했다. “너무 잘 보고 있어!” “누나, 좀 말랐네?!” 선배의 안부를 묻는 손현주에게서 정말 백홍석의 모습이 비쳤다.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극본 박경수·연출 조남국)의 백홍석은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이웃. 강력반 형사로 범인을 쫓느라 하나뿐인 딸과 약속을 수시로 어길 수밖에 없는, 세상 모든 아버지처럼, 그 역시 그렇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여전한 사랑으로 살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딸의 억울한 죽음과 그에 얽힌 진실을 감추려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좌절하며 절규할 수밖에 없는 모습은 부정(父情)의 한없음 그리고 약한 자, 갖지 못한 자, 없는 자들의 절박한 항변으로 들려온다.
손현주는 ‘바로 그’여서 평범한 이웃과 한없는 부정과 약한 자들의 항변으로 현실에서 백홍석으로 살아난다.
-수염 탓인가. 좀 피곤해보인다.
“쉼없이 (드라마를)찍고 있다. 그래도 연출자가 합리적이어서 현장 분위기는 좋다. 보시다시피 (대기실의) 스태프들 얼굴이 밝지 않나. 허허!”
-실제로는 어떤 아버지인가.
“중학교 2학년생인 딸과 초등학교 3학년생인 아들이 있다. 뭐, 그냥 이웃집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추적자’를 보면서 딸이 그러더라. ‘울화통이 터진다’고. 하하! 아들 녀석도 울더라.”
-왜 화제가 되는 걸까.
“말이 되는 드라마라고 할까?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며 괴롭고 서글프고 안쓰럽게 느끼는 것 같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혹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그래서 더 그럴 것이다. 대사도 가슴 아픈 게 많고. 생각해봐라. 월급 200여만원 받아 임대아파트에서 아내, 딸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이 일순간에 허물어진다. 시청자의 가슴에 박힌 어떤 응어리와 같지 않을까. 대리만족을 주면서도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에 나 역시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후반부로 가면서 시청자가 느낄 서글픔을 좀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시원함은 못 드릴 것 같다. 허허! 참! 답답함의 현실도 마찬가지일 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연기하고 있다. 이젠 머리 좋은 양반들이 좀 풀어 달라. 강자는 전화 한 통이면 되지만 우린 그런 게 없지 않나.”
-그런 현실적인 스토리는 당신이나 김상중, 박근형 등 베테랑들의 연기가 힘을 더한다.
“나나 (김)상중이나(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다) 모두 아이돌 스타는 아니다. 박근형 선생님도 앉은 자세 자체가 포스다. 정말 연기 잘 하시는 분들 아니냐. 한류의 확대라는 측면에선 젊은 아이돌 스타들도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40대, 50대 이상 연기자들의 작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세히 살펴봐라. 어느새 드라마에 삼촌이 없어졌다. 할아버지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 언젠가는 아버지 캐릭터도 없어질지 모른다. 또 지나친 아이돌 스타 편중은 해외에서 한국 드라마의 전부로 인식할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나.”
-캐릭터가 명징해보여 연기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은 점도 많지 않을까.
“진정성이 진해야 하는 드라마다. 나 역시 갇힌 것 같다. 다른 작품에선 이렇게 몰리고 갇히지 않았는데…. 돌파구가 없다. 연기자로서도 마찬가지다. 1, 2회 대본을 보고 과연 이 이야기가 드라마로 가능한 것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미쳐서 연기한다고 하더라. 당신을 미치게 하는 건 뭔가.
“선택하는 순간 미치는 것이다. 모든 연기자가 다 그렇다.”
-그럼 왜 당신이었을까.
“평범해 보여서였을 거다.”
-연출자들은 당신의 일상 연기의 디테일에 대해 호평하더라.
“내가 서울 흑석동에 살 때 5∼6만원 들고 후배들을 만나면 그 돈으로 3차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 선술집을 찾아다니면서. 거기 가면 이 시대 아버지들이 정말 많다. 그들의 대화 속에 시대의 아픔이 담겼다. 그걸 듣고 써놓기도 하고. 그러면 그게 내 것이 된다. 그런 잔상을 기억하려 애쓴다.”
-지금도 그런가.
“똥배우란 말이 있다. 연기 못 하거나 대충 하는 연기자. 계속 준비하는 거다. 때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배우는 욕심으로 얻는 게 아니다. 학교 다닐 땐 죽기 살기로 연극 보러 다녔다. 인생 수업이기도 했다.”
-공채 탤런트 이전에 극단 생활을 한 건가.
“극단 미추 출신이다. 원래는 신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집안 출신인데, 종교음악에 끌렸다. 자연스럽게 연극을 보게 됐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는데 정말 별세계더라. 신학을 포기하고 연극을 공부하기로 했다. 졸업 후 극단 생활을 했다.”
-그 시절 곱창집에서 일했다는데.
“하하! 그렇다. 곱창을 다듬었다. 돈 없을 때다. 곱창 좋아하나? 팁 하나 줄까? 곱창은 부드러울 수 없다. 하하! 돈 없어도 종로5가역 인근 전방에서 마신 술이 얼마나 맛있던지.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한 건 이미 무너져 내린 때였다. 마당놀이의 1인 15역, 16역을 하면서 연기를 다시 배웠다.”
-연극 무대를 지킬 생각은 없었나. 공채 탤런트가 됐다.
“형(그의 형은 현재 한 영화전문지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다)이 원서를 냈다. 대학 후배지만 나보다는 나이 많은 FD(플로어디렉터, 무대 혹은 세트 진행)가 원서에 씌어진 내 이름을 보고 접수를 도와주기도 했다. 넥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3차 카메라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러니 자꾸 욕심이 나더라. 곱창은 더 이상 다듬기 싫고 (합격 여부가)기다려지더라. 합격 후 20만원을 받았는데 정말 큰 돈이었다.”
-자, 이제 돌파구를 찾아야 할텐데.
“힘들다. 기를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다.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기를 좀 달라. 하하!”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tadada11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mangoo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