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 People] 이정철 “막내 반란은 내 잔소리 덕…용병도 열외없다”

입력 2013-04-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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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기업은행을 창단 2년 만에 V리그 여자부 정상에 올려놓은 이정철 감독은 많은 훈련을 통해 흘린 땀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IBK기업은행을 창단 2년 만에 V리그 여자부 정상에 올려놓은 이정철 감독은 많은 훈련을 통해 흘린 땀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 창단 2년만에 우승…IBK기업은행 감독 이정철

41세에 처음 프로배구팀 감독이 됐다. 꼴찌만 하던 팀. 이것저것 부족한 팀의 신임감독 대부분은 제 뜻을 펴보기도 전에 상처만 입은 채 사라졌다. 2001년 흥국생명 감독 이정철도 마찬가지였다. 3년 계약을 채우지 못했다.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쳐 한국배구연맹(KOVO) 전문위원 등으로 현장을 떠나지 않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2010년 10월. 신생팀 IBK기업은행의 창단감독이 됐다. 50세 때였다. 신접살림을 차리듯 하나 둘 뭔가를 만들어가며 앞을 향해 달려갔다. 2년5개월 만에 우승까지 했다. 여자팀을 지도한지 20여 년째다. “나도 그렇지만 여자팀 지도자들은 모두 직업병이 있다. 선수들에게 볼을 때려주면서 어깨 팔꿈치에 생긴 통증이다. 현역시절에도 생기지 않았던 병이다. 신생팀은 모든 것이 준비된 팀보다 몇 배나 힘들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원하고 만족하면 이겨낼 수 있다.”


비시즌 매일 한시간씩 더 훈련

힘들지만 버티는 것이 중요해

땀방울은 결코 배신하지 않지


여자선수들과 함께한 20년

소통 노하우는 디테일한 잔소리



이젠 눈빛만 봐도 알아서 척척


난 정상을 지키지 않는다

초심 가지고 다시 도전할 뿐


○가장 먼저 복덕방으로 달려간 감독

IBK기업은행은 2010년 11월23일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KOVO의 신생팀 창단 규정대로라면 그해 졸업반 여고생 가운데 상위 8명을 지명해야 했지만 창단발표가 늦어지면서 타 구단의 반발이 심했다. 양보했다. 중앙여고, 남성여고, 선명여고의 10명을 선택했다. 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딱 10일 있었다. 회사 사정으로 연수원을 오래 쓸 수 없었다. 훈련장도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수일여중 체육관을 빌렸다. 교장선생님을 만나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얻어낸 훈련장이었다. 이 감독이 직접 나서서 찾아낸 장소였다.

숙소가 없어 진주로 옮겼다. 선명여고 훈련장을 빌렸다. 감독 코치 트레이너 각 1명에 10대 선수 10명이 전부였다. 이 기간동안 프런트로 발령받은 1명이 수원의 복덕방을 뒤졌다. 훈련장 부근의 아파트가 나오는 대로 계약을 했다.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이 사용했던 숙소들이었다. 감독도 훈련이 끝나면 복덕방으로 달려갔다. 아파트 한 두 채로 될 일이 아니었다. 웨이트트레이닝 장소가 없어 장안구청 구민회관을 이용했다. 아파트 주민들과 구민회관 헬스클럽 회원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감독은 여기저기 머리를 숙이면서 다녔다.

이정철 IBK 감독. 스포츠동아DB

이정철 IBK 감독. 스포츠동아DB



○금성에서 온 10대 여자선수 화성에서 온 50대 남자감독

2011년 1월 확대 드래프트를 통해 이효희와 박경낭을 영입했다. 이효희는 1년 후배 김사니 때문에 2번이나 상처를 받고 배구를 쉬고 있었다. 2007시즌 인삼공사에서 FA선수로 영입된 후배에게 밀려 흥국생명으로 갔으나 3년 뒤 김사니는 흥국생명까지 FA선수로 따라왔다. 두 사람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감독은 한 마디만 했다. “운동은 각오해라. 봐주는 것 없다.”

훈련은 독하게 했다. 어린 선수들은 감독의 배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팀의 막내는 1993년생 박정아. 10대들에게 1960년생 50대 남자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1980년생 이효희가 중간에서 선수들과의 통역이 됐다. 어린 선수들은 멋있게 때려서 점수 내는 배구만 알았다. 감독은 배구가 득점의 경기가 아니고 실점의 경기라고 했다. 공격보다는 수비, 범실을 줄이기 위한 정교한 배구를 원했다. 선수들이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1년 반이 지난 뒤에서야 김희진이 “이제 선생님의 잔소리를 이해한다”고 털어놓았다.

인삼공사에서 이소진, 도로공사에서 정다은, GS칼텍스에서 지정희를 받았다. 차츰 팀의 구색이 갖춰졌다. 외국인 선수도 물색했다. “성공의 조건은 하나, 높이라고 생각했다. 자료를 보면서 여러 선수를 물색했다. 눈에 띈 선수가 있었다.” 감독은 영상을 보다가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확인을 했다. 2년 전 오른 무릎 수술을 했다는 대답이 왔다. 메디컬체크를 통과해야 계약을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백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키 196cm 알레시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회는 땀으로 준비하는 사람에게 온다

기업은행은 창단하면서 감독후보를 수소문했다. 이 감독도 그 중 하나였다. 면담 때 제출한 자료가 있었다. 5개 팀 장단점과 대비책을 제시한 문서였다. 비록 현장에 가지 못하고 겉에서 맴돌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준비를 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멘토는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었다.

첫 시즌은 힘들었다.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였다. 시즌 뒤 이효희가 “더 이상 힘들어서 못 하겠다”면서 사라졌다. 박경낭과 함께였다. 위기였다. 두 사람과 친한 선배 최강희를 찾았다. 사정을 얘기했다. 최강희가 문제해결에 나섰다. 이효희는 그 뒤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돌아왔다. 박경낭은 2주일이나 시간을 줬지만 결국 답이 없었다.

힘든 일 뒤에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GS칼텍스에서 트레이드 제의가 왔다. 남지연과 김언혜를 받아들였다. 현대건설에서 배구를 그만 둔 윤혜숙도 제 발로 찾아왔다. 두 번째 시즌을 앞두고 완벽하게 퍼즐이 맞아 떨어졌다. 더욱 많은 땀이 필요했다. 휴일도 없었다. “비시즌 때 다른 팀보다 매일 한 시간 더 훈련했다. 훈련이 끝날 무렵 몸이 무거울 때 1시간 더 훈련하면 더 힘들지만 버티는 것이 중요했다.”


○여자 선수와 소통의 노하우는 디테일

여자 선수들과 20년 가까이 지내면서 배운 것은 디테일의 중요성이다. 매일 같은 소리를 반복해 선수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늘 확인하고 얘기하는 습관이 필요했다. 어린 선수들에게 인사하는 방법부터 하나하나 가르쳤다. 훈련 때 테이핑을 해서 부상을 방지하는 법 등 생활습관을 일일이 알려주고 또 확인해야 탈이 없었다.

“선수들에게 일에 관해서는 절대양보가 없다는 원칙을 심어줬다. 선수들이 믿고 따르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 자신이 먼저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외국인 선수도 마찬가지. 감독이 나설 게 아니었다. 선참들이 컨트롤 하게 해줬다.”

2012∼2013시즌, 팀은 두 번째 시즌에 전혀 다른 팀이 되어 있었다. 서로 눈빛만 봐도 감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소통이 되고 있었다. 5라운드 한 차례 고비도 있었지만 이효희가 슬기롭게 넘기게 해줬다. 남지연도 도왔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단기간에 정규리그 1위를 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도 2연승을 하며 우승을 눈앞에 뒀다. 3차전 4세트 23-21에서 상대 GS칼텍스의 베띠가 백어택 라인을 밟았다. “그런 실수는 쉽게 나오지 않는데 그 순간 우승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업은행은 역전패 당했다. 24-21에서 한 점도 뽑지 못했고 5세트마저 내줬다. “만일 그 경기가 4차전이었으면 5차전에서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날 한 가지 배웠다. 어떤 순간에서도 감독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프로감독생활 5시즌 만에 처음 우승의 기쁨을 맛본 그는 새로운 시즌을 향한 준비에 들어갔다. “수성(守成)의 중요성도 알고 어려움도 얘기한다. 준비하고 있다. 나는 정상을 지키지 않는다. 다시 정상에 도전할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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