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View]카도쿠라 켄 “한국야구에 가장 필요한건 명포수”

입력 2013-06-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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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카도쿠라 켄 사진제공|삼성라이온즈

■ 삼성 인스트럭터로 제2의 야구인생

삼성 카도쿠라 켄(40) 투수 인스트럭터는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리그에서 뛰었고, 메이저리그(시카고 컵스)에 도전했다가 2009년 SK에 입단해 한국무대를 밟았다. 2010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까지 맛봤지만, 삼성으로 이적한 2011년에는 시즌 중반 무릎 부상으로 중도 퇴출의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인리그(히지리가오카병원)에서 선수생명을 이어갔고, 2012년에는 일본 12개 구단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마지막 도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선수생활을 마감했지만, 올해 인스트럭터로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3년간(SK·삼성) 선수로 뛴 한국에서 지도자로 데뷔해 올해로 한국생활 4년차에 돌입한 그를 만났다. 그는 야구선수로서 파란만장했던 삶과 지도자로서 첫 발을 삼성에서 내딛게 된 이유, 앞으로 헤쳐 나갈 제2의 야구인생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빈번했던 프로팀 이적 지도자 생활에 도움
김성근 감독, 공 던지는 기쁨 알게해준 은인
내 조언이 선수들에게 도움 될 때 큰 보람
기술·태도 등 현재 삼성 최고투수는 윤성환
백정현 차우찬 김현우 미래 기대되는 재목



-카도쿠라 켄은 어떤 선수였는지 궁금하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말해달라.

“하하. 그때부터 얘기해야 하는 건가. 음…. 야구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게는 야구가 곧 ‘놀이’였다. 노는 게 즐거워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 이후 야구와 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투수를 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외야를 봤다. 이후 키가 커서 1루로 이동했고, 5학년 때 큰 키가 아까우니까 투수를 한 번 해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시작했다.”


-고등학교(세이보우가쿠엔 고교) 때 에이스였다고 하던데….

“중학교 때는 존재가 미미했다. 심지어 사이드암투수였다.(웃음) 중학교 3학년 때 190cm까지 키가 컸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오버핸드로 던지기 시작하면서 3학년에 에이스가 됐다. 그래도 직구 스피드는 시속 138km에 불과했다. 주목 받을 만한 투수는 아니었는데, 키 덕분에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의 눈에 띌 수 있었다.”


-프로에 입단 후 여러 팀(주니치→긴테쓰→요코하마→요미우리)을 거쳤다.

“프로에 들어가서도 난 에이스가 아닌 2·3선발 투수였다. 성적이 나쁘지 않아 대부분 1군에 있었지만, 2군에 내려갔을 때 다른 팀의 스카우트들이 ‘아깝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서 트레이드 대상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처음 트레이드됐을 때는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팀을 옮기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공부도 됐다. 그 경험이 지도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에선 요미우리에서 마지막으로 뛰었고, 메이저리그를 거쳐 2009년 한국행을 결정했다. 왜 한국행을 결정했나.

“당시 SK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현 고양 원더스 감독이 내가 자유계약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접촉해왔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연락이 와서 솔직히 놀랐다.”


-2009년 SK에 입단해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맛봤다. 포스트시즌에는 호투를 펼치며 팀이 우승하는 데 보탬이 됐는데….

“요미우리에 있었던 2년간 2군에 머무르면서 야구가 정말 싫어졌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야구를 하는 즐거움, 공을 던지는 기쁨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그런 기회를 준 김성근 감독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김성근 감독은 어떤 스타일의 지도자였나.

“처음에 놀랐다. 일본에서 대개 감독이 지시하고 코치가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김 감독은 먼저 나서서 펑고를 치고 배팅볼을 던지고 볼을 주웠다.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카도쿠라의 포크볼은 한국리그에서 유명했다. 어떻게 던지게 됐나.

“대학 때도 포크볼을 던졌는데, 본격적으로 던진 것은 프로에 들어와서다. 주니치 입단 후 1군에 올라왔을 때 당시 팀의 3번타자였던 다쓰나미 (가즈요시) 선배가 불펜피칭을 하는 나에게 ‘키가 크니까 포크볼을 던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다쓰나미 선배의 조언을 듣고 던지기 시작했고, 이후 나의 주무기가 됐다.”


-투수도 아닌 타자 선배의 조언이었다는 게 재미있다.

“나는 당시 팀에 갓 들어온 신인이었고 다쓰나미 선배는 TV에서 보던 스타플레이어였다. 돌이켜보면 다쓰나미 선배가 내가 투수로 살 수 있게끔 길을 열어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SK에서 우승을 하고 삼성으로 옮겼는데, 결국 시즌 도중 교체됐다.

“무릎이 안 좋았는데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2009년(8승4패·방어율 5.00)보다 2010년(14승7패·방어율 3.22)에 성적이 좋아져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회인리그에 들어갔다. 지난해에는 프로구단의 문을 두드린 것으로 안다. ‘네버 기브 업(Never give up)’ 정신이었나.

“아마추어리그도 한 번 겪어보자는 생각에서 사회인리그였던 히지리가오카 병원에 입단했다. 1년간 야구도 했지만, 사무실에서 일하고 약도 나르고.(웃음)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인생경험을 했다. (지난해 12개 구단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것은) 선수생명을 연장해보자는 마음보다는 ‘은퇴경기를 사회인리그에서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첫 번째였고, ‘내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결말을 지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독립리그 몇 개 팀에서 러브콜이 있었는데, 나이도 있었고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 납득했다.”


-은퇴 후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인스트럭터 제의을 받아들인 것은 2011년 기회를 준 삼성에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인스트럭터로 사는 건 어떠한가.

“보람을 느낀다. 물론 메인 코치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또 지도자로서 첫 해이기 때문에 모자란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내가 느끼는 바를 말하고 선수가 그 조언을 받아들여 좋은 모습을 보일 때, 내가 선수로 뛰었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느낀다.”


-코치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뭐라고 보나.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선수도 나처럼 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넌 왜 그걸 못해’라는 생각으로 다그치면 안 되는 것 같다. 선수가 가진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코치는 그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돕고, 그라운드 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게 역할이라고 본다.”


-삼성에는 뛰어난 투수가 많은데 최고로 꼽는 선수가 있나.

“당연히 윤성환이다. 기술적인 것뿐 아니라 연습태도 등 모든 면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모범이 된다. 오히려 윤성환에게 내가 배우는 점도 많다.”


-삼성에서 기대되는 젊은 투수들은 누구인가.

“백정현, 차우찬이다. 좌완투수이고, 아직 투구에 기복이 있지만 그 차이를 줄이게 된다면 좋은 투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신인 김현우도 볼이 빠르기 때문에 발전가능성이 높다. 경험을 쌓으면 마무리로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양국리그를 모두 경험했는데 한국야구와 일본야구의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큰 차이가 없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야구스타일이 메이저리그처럼 ‘빅볼야구’를 한다는 느낌이었는데, 몇 년 사이 세밀함이 더해졌다. 현재 한국야구와 일본야구는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야구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어떤 점이 보완돼야 한다고 보나.

“캐처다. 현재 한국 포수들은 공격적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포수는 투수리드를 할 때도 상황에 따라 공격적으로 가야 할 때와 수비 위주로 가야 할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한국에서 가장 잘하는 포수는 SK 박경완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카도쿠라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음…. 어렵다. 야구가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또 야구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이 안 된다. 생각해보면 야구를 할 운명인 것 같긴 하다. 중학교 때 아무리 노력해도 공이 안 빨라져서 야구를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한 학년 위 선배가 무조건 고등학교 야구부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선배가 무서워서 테스트를 받았고 계속 야구를 했다. 만약 그 선배가 없었더라면 야구를 안 했을지도 모른다. 야구를 할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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