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남 양형모입니다] 추천이 아니라 강권하고 싶은 ‘가을반딧불이’

입력 2013-06-25 16:05:52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과연 정의신”이다 싶은 작품, 가을반딧불이.
어김없이 구질구질하고, 구질구질한 가운데 뭐라 말하기 힘든 온기가 스멀스멀 마음을 덥히는 연극이다.

“루저들 얘기죠. 루저들 얘기가 매력있잖아요. 잘난 사람들 나오면 위로가 안 되니까. 못난 사람들이 나와서 못난 짓을 하는 게 희극의 제1법칙이죠. ‘저렇게 못난 사람도 있구나. 나는 좀 낫구나’. 뭐 이런 거?”

배우 이항나는 정의신 작가의 ‘아시안스위트’에서 여주인공 치요코 역을 맡았었다. 이번 '가을반딧불이'는 그녀와 정의신의 두 번째 만남이다.

시간마저 멈춰 버린 듯한 호젓한 호수의 낡은 보트 선착장.
스물아홉의 까칠한 청년 다모쓰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삼촌 슈헤이와 21년째 살고 있다.
다모쓰는 어린 자신을 삼촌에게 버리고 가버린 아버지 분페이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지만 삼촌을 가족이라 여기고 살아간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스럽지는 않아도 문제는 없는' 일상이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머물 리 없다.
잔잔한 두 남자의 일상에 한 여자와 남자가 끼어든다.
슈헤이의 애인으로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슈헤이의 단골카페 마담 마쓰미와 보트를 타러 왔다가 "갈 곳이 없다. 같이 살게 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눌러 앉은 사토시다.

마쓰미와 사토시의 등장이 영 달갑지 않은 다모쓰는 두 사람에게 까칠하게 굴고 나날이 갈등이 깊어진다.

정의신 작가의 작품답게 버릴 데가 한 군데도 없는 대사의 맛이 골뱅이처럼 쫄깃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게 상당 부분 배우들의 애드리브라니 놀랍다.

"애드리브가 많아요. 저도 대본대로 대사하는 게 많지 않죠. 정의신 작가 작품이 꽉 맞춰져있지 않거든요. 현장성이 가미된 대본이라고 해야 하나. 정 작가 자신이 작가이기 전에 연출가이기도 하니까. 배우들도 정 작가의 대본을 고전 바라보듯 하지 않죠. 나름의 현장성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항나 배우가 말했다. 그는 불룩한 배를 하고 슈헤이를 찾아온 마쓰미로 이 작품 유일의 여자 캐릭터다. 애교쟁이면서 푼수 끼가 있고. 배운 게 없어 보이지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 ‘가을반딧불이’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

비가 며칠 때 쏟아지던 어느 날.
다모쓰는 불쑥 따로 살 곳을 구했다며 집을 나가겠노라 선언한다. 저 멀리에서 그를 데리러 온 밴의 경적 소리가 들린다.
슈헤이는 다모쓰를 말리지만 다모쓰는 "말도 없이 두 사람을 받아들인 삼촌이 먼저 나와의 신뢰를 버린 것"이라며 완강하기만 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마쓰미는 "내가 나가면 일이 해결된다"며 짐을 꾸리고, 감정이 폭발한 슈헤이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상처를 털어놓은 뒤 자신이 이 집을 나가겠다고 주장한다.

정의신 스타일의 클라이맥스다. 상황은 극으로 치닫고, 난리통에 마쓰미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진다. 모두들 싸움을 멈추고 마쓰미 병원 후송작전에 나서게 되는데 ….

이항나는 "정의신 작가의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이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은 주요 인물 한 두 명 정도만 입체적이고 나머지는 본인의 삶 없이 스토리 진행을 위한 존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의신의 작품은 다르다.

"정 작가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내 작품은 모두가 다 주인공이다'라고. 그래서 커튼콜 때도 항상 모든 배우가 다 같이 나오죠. 정 작가 작품 속 인물은 분명히 배우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항나는 "어떻게 보면 정의신 작가의 작품은 주인공이 제일 재미없다"라며 웃었다.
주인공 치요코를 맡았던 '아시안 스위트' 때가 그랬단다. 그래서 이번에 주인공 다모쓰를 맡은 이현응에게 "이번에 너 힘들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마쓰미 역은 무척 재미있다고 했다. 사토시 역의 배성우는 '아시안스위트' 때에도 함께 했던지라 20년은 같이 연기한 사이처럼 찰떡호흡이다.
이항나는 "(배)성우와 나는 이번에 만담으로 승부하고 있다"라며 "하하하!" 웃었다.



● 티켓을 사서 소중한 이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작품

2011년 '아시안스위트' 이후 이항나는 한 동안 작품 출연이 뜸했다.
"아팠다"고 했다. '아시안스위트'에서 에너지를 다 소진한 탓이 컸다.
힘든 시기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배우가 살면서 계속 소진하기만 하면 관객에게 들려줄 얘기가 없잖아요. 아프고 슬럼프를 겪으면서 할 얘기가 생긴 거죠."
이번 '가을반딧불이'는 '할 얘기'가 생긴 이항나의 컴백무대다.

말로는 "쉬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대학 강의가 늘었고, 새로운 작품을 두 편이나 썼다. 영화도 촬영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항나의 또 다른 직업은 극작가이다. 정신병동 이야기를 다룬 '육호실'이라는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9월에는 자신이 쓴 작품 '그녀의 방-세 번째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방' 세 번째 시리즈이다.

'가을반딧불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식구'다.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뜻하는 '식구'. 식구가 없어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의 식구가 되어주는 과정을 통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정의신표 푸드가 자리한다.
'함께 먹는다'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엿보이는 전골이 '아시안스위트'에 이어 '가을반딧불이'에서도 등장한다. 작가가 의외로 전골 마니아인지도 모르겠다.

마쓰미와 사토시의 만담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재미있는 극. 보트 선착장을 옮겨다 놓은 무대는 탄성이 나올만큼 섬세하고 예쁘다.

6월 30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막 내릴 때가 다 되어가니 못 보신 분들은 서두르는 게 좋겠다.
대극장 공연이지만 A석 1만원, S석 2만원, R석 3만원으로 티켓가격도 착한 편이다.

"'가을반딧불이'는 쉼표같은 작품이죠. 쉬어갈 수 있는 작품. 그저 웃고 떠들기만 하는 작품이 아니니까. 재밌으면서 조금은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이항나)"

보고 나서 '재밌다'라고 생각한 작품은 제법 많지만 ‘꼭 보라고 해야지’하고 누군가의 얼굴을 딱 떠올리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내 돈으로 티켓을 구입해 소중한 누군가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작품.

추천이 아니다
‘가을반딧불이’는 "내가 느낀 바를 너도 한번 느껴봐라"하고 '강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양형모 기자 ranbi361@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
사진제공|조은컴퍼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