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채의 사커에세이] 아빠, 서울은 왜 북 치며 응원해?

입력 2014-07-24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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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FC서울의 K리그 클래식 16라운드 경기 장면. 이날 경기장을 찾은 1만6000여명의 팬들은 경기 종료 직전 잇달아 터진 골 공방을 통해 모처럼 K리그의 묘미를 즐겼다. 사진제공|제주 유나이티드

■ 아들과 함께 축구장에 가다

서울서 태어나 제주로 이사온 8세 아들
제주 vs 서울 어느 쪽 응원할지 헷갈려
33세 K리그의 성장…옛 열정 되살아나


아들과 함께 축구장을 다니다 보면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을 새로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축구 경기지만, 여덟 살짜리에게는 아직 복잡하고도 신기한 게 축구인 모양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 서귀포에서 열린 제주와 서울의 경기에선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빠, 왜 가운데서 공을 찰 때는 벽을 만드는데 구석에서 찰 때는 벽을 안 만들어?” 해석하자면, 프리킥 상황에선 상대 수비진이 나란히 서서 장애물을 만드는데, 코너킥에선 왜 그러지 않느냐는 거죠. “그건 말이지…”라고 뜸을 들이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코너킥보다는 프리킥이 직접 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수비하는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더 공을 들여서 막아내고 싶은 거겠죠. 그날 경기에선 홈팀 제주가 천적 서울을 맞아 19경기 만에 첫 승리를 거두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제주도로 이사 온 아들은 사실 두 팀 중에서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하는지도 헷갈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눠준 무료입장권과 연간 어린이회원 카드에는 제주 유나이티드의 엠블럼이 선명하게 찍혀 있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죠.

“근데 제주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는데, 왜 서울 사람들은 북 치고 춤 추면서 응원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남쪽 관중석에 자리 잡은 원정 팬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단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반면 홈팬들은 비교적 얌전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죠. “응, 그래도 저 사람들도 응원하고 있을 거야.”

하프타임에 본부석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역시나, 춤과 노래만 빠졌을 뿐 제주도의 축구사랑은 정말 대단합니다. 선수들에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실시간으로 작전지시를 내리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부터,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니까 애꿎은 심판 탓을 하고 있는 아저씨까지,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제주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습니다. 제주는 올 시즌 최대의 빅매치인 서울전에서 2만 관중 입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으리의 사나이’로 분장한 박경훈 감독처럼 선글라스를 챙겨온 덕분에 무료로 입장한 저희 식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식혜, 피자, 라면에다 말고기까지 얻어먹었습니다.

아쉽게도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경기장을 찾은 1만6000여 팬들은 경기 종료 직전에 한 골씩 주고받은 양 팀의 명승부를 볼 수 있었죠. 전광판 시계가 멈췄는데 왜 경기는 끝나지 않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드로겟의 동점골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재미있는 축구를 봤는데 그 정도 수고야 아무 것도 아니었죠.

문득 제가 처음으로 축구장에 갔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7년 가을이었죠. 프로축구팀이 없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는 스무 살이 돼서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실운동장에 가서 처음으로 축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상대가 카자흐스탄 아니면 우즈베키스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것보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건 당시 프로축구연맹에서 제작해 경기장에서 나눠줬던 K리그 올스타 스티커북이었습니다.

고종수, 안정환, 이동국이 이끌었던 우리나라 프로축구의 황금기가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K리그는 참가팀 수가 늘어난 반면, 열악한 구단재정, 연고이전, 승부조작 등 여러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연맹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선수이적시스템이나 승강제 등 제도적 부분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죠.

이제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건 팬들의 역할입니다. 어느덧 서른세 살 청년으로 성장한 K리그를 더욱 빛내줄 수 있는 건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스무 살의 순수한 열정, 아니 여덟 살의 순진한 동심이 아닐까요?


● 정훈채는?=FIFA.COM 에디터. 2002한일월드컵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 관중 안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축구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UEFA.COM 에디터를 거치며 축구를 종교처럼 생각하고 있다. 2014브라질월드컵에는 월드컵 주관방송사인 HBS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국제축구의 핵심조직 에디터로 활동하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꿰고 있다.

[스포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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