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의 독재자’ 설경구 “영화 찍으며 처음으로 ‘아버지’ 생각”

입력 2014-11-08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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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설경구가 “우리 시절엔 김일성이 ‘빨갛고 뿔난 도깨비’ 같은 존재였다. TV도 없던 시절이라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고 말했다.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연극하던 때가 생각나더라고. 하하! 캄캄한 밤에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지. 낮에 붙이다 경찰한테 걸리면 벌금을 내야하거든. 아무도 없을 때 테이프로 참 많이 붙였지. 객석 청소도 하고, 옛날엔 쥐도 많았어. 문에 걸려서 죽는 애들도 많았지. ‘찍찍’하고.”

배우 설경구가 20년 전 연극배우 시절을 떠올렸다. 대학생 때 얼굴까지 덜덜 떨며 무대에 올랐던 기억부터 사회에 나와 첫 연극 ‘심바새매’를 연기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에는 너무 떨려 선물 받은 술을 몽땅 마시고 속사포로 대사를 뱉었다며 웃음을 보였다. 감춰둔 추억을 꺼낸 건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에서 무명 연극배우 성근을 연기해서다. 설경구는 “작품을 하며 연극하던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가 연기한 ‘성근’은 1970년대 유신정권시절,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는 대통령을 위해 비밀리에 김일성 대역 연기를 해야 했던 무명배우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 무대에서 벌벌 떨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줘 부끄러웠던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거머쥐며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하지만 그만 연기에 미쳐 자신이 ‘김일성’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리고 만다. 따뜻했던 ‘아버지’가 차가워진 ‘독재자’로 변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다. 지금이야 다정다감한 아버지들이 많지만 우리 시절은 안 그랬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독단적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자녀들은 아버지가 군림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녀에게 뜯어 먹힌 세대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남는 것은 없다. 어느 순간 쭈글쭈글한 주름에 어깨가 작아져 버린 한 남자만 남을 뿐이다.”

그는 “20년간 연기자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은 ‘나의 독재자’가 처음이었다”며 “힘 없을 때 쪼그라들었던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더라. 이해준 감독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써나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설경구의 연기는 두말할 것이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최고의 관객인 아들을 늘 마음에 새겨둔 아버지 연기에 눈물이 글썽하고 맺힌다. 극의 마지막이자 절정인 순간에 끝내 그는 ‘김일성’ 연기를 완벽하게 마친다. 하지만 성근의 연기는 마치지 않았다. 몇 십 년 전, 단 한 명의 관객인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가슴에 응어리가 졌던 그는 과거에 실패했던 ‘리어왕’의 광대 대사를 강하게 읊조리며 진짜 배우가 된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라 부담이 됐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역할을 맡았다고 좋아서 무대를 찾은 아들이 단 한마디도 못하고 벌벌 떠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나. 성근은 ‘김일성’ 역할에 미쳐버리기도 했고 가슴 한 켠에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다. 마지막에 ‘리어왕’ 대사를 뱉을 때는 저절로 눈물이 흘렀는데 이해준 감독이 대본상 두 줄 앞에서 눈물을 흘리라고 하더라.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감독에게 짜증도 냈다. 하하.”

배우 설경구.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설경구의 명품 연기도 연기지만, 특수 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김일성을 연기하는 성근을 표현하기 위해 체중을 늘렸지만 김일성 외모가 돼가는 김성근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선 특수분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평균 5시간이 걸린 고난도의 특수분장을 통해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고 있던 노년의 ‘성근’을 완성해낸 설경구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분장을 하고 “내래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이야”라고 대사를 내뱉는 순간 감탄이 쏟아지고 만다. 설경구는 이 모든 공을 박해일에게 돌렸다. 그는 분장 이야기를 하며 “해일이가 없었으면”, “해일이 덕분에”라는 등 입술이 마르고 닳도록 박해일을 언급했다.

“(박)해일이가 ‘은교’로 노인 분장을 했지 않나. 그 때는 10시간씩 했다고 하더라.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5시간 정도 걸린다. 그것도 힘들었는데 두 배나 걸려서 해낸 해일이를 생각하니 불평불만도 못하겠더라. 하하. 박해일에게 고마웠던 것은 나에 대한 배려가 끊이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래도 분장을 한 사람이 촬영을 가장 먼저 한다. 시간이 지나면 찢어지거나 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촬영현장 가운데 박해일은 늘 묵묵히 기다려줬다. 연기 리듬이 깨질 수 있는데 분장을 해 본 사람이라 이해를 하는 것 같더라.”

이 영화를 김일성을 연기하는 배우 김성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도와는 다르게 비뚤게 바라볼 수도 있을 터. 이에 대해 묻자 “아버지의 시각으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도, 김성근도 아버지의 감정으로 달려왔다. 이 영화를 통해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물론, 어색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숨에 좋아지진 않겠지만 소통의 시작은 ‘이해’가 아닐까. 독단적으로 보이지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의 독재자’를 마친 설경구는 ‘서부전선’을 촬영 중이다. 찐 살을 도로 빼고 있다. 이미 ‘실미도’, ‘역도산’ ,’공공의 적’, ‘오아시스’를 차례로 찍으며 고무줄 몸무게 연기를 펼친 그이기에 체중 변화는 일도 아닌 일이 됐지만 여전히 힘든 일이다.

“여진구가 아직 미성년이지 않나. 그래서 술 마실 일은 별로 없다. 체중 변화는 힘들지만 여진구의 젊은 에너지를 받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허허.”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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