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 130년. 배우 전무송, 권성덕, 김명곤의 연기 생활을 합친 세월은 한 세기가 꼬박 넘는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긴장과 기대감의 연속이었다. 관록 있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들뜬 마음이 드는 동시에 혹여 실수라도 할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교차했다. 하지만 따뜻한 커피와 함께 “긴장하지 마라”며 말을 건네준 세 배우는 마치 일을 마치고 집에 온 딸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이 세 배우는 연극 ‘아버지’를 이끌었다. 아서 밀러의 고전 명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 만든 이 작품은 청년 실업과 노년 실업,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가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세태를 반영했다. 또한 ‘슈퍼맨’ 같았던 아버지의 초라해진 노후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해 세대를 넘어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세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집에 돌아가면 집안의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들은 어느 작품보다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버지’ 무대에 올랐던 전무송은 늘 이 작품을 할 때마다 신기함을 느낀다고. 그는 “이 작품이 서양 작품이긴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머니 잔소리나 아버지의 꾸중은 어딜 가나 있는 것 같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만과 우리 아버지가 어찌나 그리 똑같던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표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화이트칼라’(샐러리맨이나 사무직 노동자)나 판검사가 되길 바라셨다. 그런데 연극배우를 한다고 하니까 ‘어디 그런 딴따라를 하냐’며 꾸중하시기도 하셨다. 나도 살면서 자녀를 키우지만 이게 뜻대로 안 된다. 그래서 더 속이 상할 때도 있다. 작품 속에서도 아버지의 희망은 아들이다. 아들이 커서 잘 될 거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갈등이 심해져 가정에 우환도 찾아오질 않나. 이 작품을 하면서 자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전무송)
연극 ‘아버지’를 기획하고 제작하며 연출 그리고 배우까지 맡은 김명곤은 “194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를 잘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라며 “결국은 ‘사랑’이 가족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고 각색을 하며 내린 결론을 꺼내기도 했다.
“어느 가정이나 사회나 갈등은 있다. 나 역시 이제 윌리 로만과 같은 나이가 됐고 극 중 인물과 같은 갈등을 겪고 있다. 고령화 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중년층은 해고를 당하고 젊은 사람들은 취업이 안 돼 가정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작품이다. 내가 각색을 하며 생각해봤을 때 ‘사랑’이 해결점이더라.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아버지는 자녀들을 이해하고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함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정답이더라. 결국은 ‘사랑’이다.”(김명곤)
전무송, 권성덕, 김명곤이 연기하는 ‘아버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젊었을 적 부인과 자녀들의 자랑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해고에 대한 불안감,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젖어 위기에 빠진 아버지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로 교차하며 보여준다. 소싯적 당당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이제는 초라해진 모습에 세파를 거친 가장의 무게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아버지’의 대사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국물을 우려내 버려지는 ‘멸치’와 같이 보여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중년이 된 세 배우 역시 변해버린 자신이나 혹은 지인 등을 통해 듣는 인생의 잔혹함이나 가장이 느끼는 공허함에 대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세월의 흐름에 대해 묻자 김명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업 간부까지 하던 친구들도 60세가 지나면 급속도로 입장이 바뀌더라. 마음이 변하고 자신감도 잃고 회의감도 느끼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고 하며 말을 이어갔다.
“친구들은 자녀,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크더라고. 그냥 주변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외로움도 크게 느끼더라고. 이때 아내와 자식들이 아버지를 옆에서 힘을 많이 줘야한다. 우리 대사 속에도 있지 않나. 국물만 우려내면 끝장나는 거냐고. 친구들도 그런 걸 느끼더라. 마치 자기가 ‘꽁치’나 ‘멸치’가 돼버린 기분이라고. 그동안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한 가장이니 가족들이 많이 챙겨줘야 한다.”(김명곤)
이를 듣고 있던 권성덕 역시 “요즘 의학이 발달해서 은퇴하고도 20~30년을 더 살지 않나. 예전에는 정년퇴직을 하면 생을 마무리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다시 살아야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 같다”며 “예전처럼 자녀들이 부모를 모실 수도 없는 현실이다. 취업도 안 되는 마당에 애들에게 부모 부양이라는 짐마저 짊어줄 수는 없지 않나”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전무송은 김명곤과 권성덕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를 하면서도 “가족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돈 버는 가장들은 집에서 큰 소리도 뻥뻥 쳤지. 그런데 이젠 집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운 가장도 있다고 하더라. 물론 그런 점에서는 가족들이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커야겠지. 하지만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 ‘나는 이제 끝났어’, ‘우리 나이에 무슨’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을 차별대우하고 자격지심을 가지면 정말 자신은 다 써버린 ‘멸치’가 돼버리는 셈 아닌가.”(전무송)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세 배우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음을 깨달았다. 일반인이라면 정년퇴직을 한참 지난 세월을 살아온 이들은 지금도 이 무대 뿐 아니라 브라운관 등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의 젊음의 비결은 무엇일까. 세 배우는 “마음을 젊게 놔두는 것”이라고 한 소리로 말했다. 김명곤은 “그 동안 마누라 속을 많이 썩였다. 이젠 말 잘 들어야지”라며 우스갯소리도 했다.
“젊어서 관절이 다 닳을 정도로 산행을 많이 했다. 요즘은 걷고 맨손 체조도 하며 산다. 친구들과 생맥주도 즐겨 마시곤 했지. 이젠 늙어서 술을 많이 못 마신다. 그런데 이 술을 마신다는 게 진탕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풀러 가는 거다. 하루 있었던 일을 소주 한 잔으로 싹 잊고 새 날에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거지”(권성덕)
이를 듣고 있던 전무송은 “권 선생하고 나하고 술을 참…. 하하. 365일을 마신 것 같아. 마누라한테 같이 야단도 맞고.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조금씩 줄이고 피우던 담배도 끊었지.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늙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해. 나는 요즘 거울도 안 보고 살아. 그리고 살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미워하지 않는 거야. 누군가를 미워하면 결국 손해 보는 건 내 마음이더라고”라고 말했다.
20대 시절 15년간 병마와 싸운 김명곤은 “틈틈이 체력관리를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며 “하지만 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건강을 위한 노력 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꿈이었던 것 같다. 연극을 하고 싶으니 건강해야한다는 악바리 정신이나 어느 정도 몸에 긴장감을 주고 살았다. 내 건강을 위해 약간의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 ‘아버지’의 막은 내려갔지만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계속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어보니 전무송은 “아버지를 믿어주는 것”이라고 답했고 권성덕과 김명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친 사랑이나 기대도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냥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으면 좋겠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귀했으면 좋겠다”(전무송, 권성덕, 김명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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