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를 찌른다’는 말. 정말일까. 실재하는 그 무엇의 날카로움이 고단한 세상살이의 허한 가슴을 갈기갈기 쑤셔놓아 끝내 울음을 토해내게 하는 것일까. 이 말의 단정할 수 없음, 표현할 수 없음의 한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실감하려거든, 장사익(사진)을 들어라.
1996년 오늘, 나이 마흔다섯에 세상 처음 자신의 소리를 담아 음반을 낸 한 사내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 섰다. 거친 듯 드문드문 난 수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한 사내는 애절하게 치솟는 고음의 날카로움 혹은 탁성에 절절함을 얹은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소리꾼’ 장사익. 1949년 충남 홍성 태생의 “이름 없는 촌놈”이 세종문화회관에 나섰다. ‘장사익 소리판-하늘 가는 길’이었다. 그 1년 전 처음으로 정식 앨범을 낸 그는 특유의 탁성과 고음으로 불과 1년 만에 대중의 입소문을 타고 대형 무대에 섰다.
“무작정 쳐들어갔어유. 나 같은 이름 없는 촌놈이 그런 무대에 선다는 게 얼마나 통쾌해유. 이런 게 사는 재미 아니겄슈. 너무 호강하는 것 같어유.”(1996년 11월16일자 한겨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겸손하게 웃으며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그는 무대에서도 똑같았다. ‘찔레꽃’, ‘꽃구경’ ‘하늘 가는 길’ 등 신산한 인생살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올 목소리가 아니며, 노래가 될 수 없다고 많은 이들은 평했다.
장사익은 고교(서울 선린상고, 현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하고 보험사로부터 시작해 과일장사, 가구점 점원, 카센터 직원 등 숱한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끼는 어쩔 수 없었다. 고교 졸업 직후 회사생활을 하면서 3년 동안 가수를 꿈꾸며 노래를 배웠다. 꿈이었을 뿐이다.
이후 1980년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귀에 박힌 동네 할아버지의 쇄납(태평소) 소리를 떠올렸다. 한 국악동호회에서 태평소를 불었다.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 금산농악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한 그는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 비로소 무대를 익혔다. 이광수의 사물놀이패와 어울려 태평소를 불 무렵이었다. 공연 뒷풀이에서 부른 노래에 임동창은 공연을 제안했고, 이는 결국 음반으로 이어졌다.
“푸짐하게 노는 거지유. 요새는 잘 놀 줄을 몰르구 그저 처음부터 때리구 부시구 하는데, 우리덜이 한 번 노는 걸 보여줄라구유. 우리 노는 건 차차루 올라서 정점에서 딱 끝내야 하는 거거든유.”(위 신문)
정작 “논다”고 말하지만, 천천히 차올라 마침내 정점에 올라서야 서서히 폐부를 아프게 하는 그 무엇, 그의 절창이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