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스타:심은하①] 다슬이 ‘마지막 승부’는 계속된다

입력 2016-08-05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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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 이름 세 글자는 지금 떠올려도 아련하기만 하다. 결코 길지 않은 6년이라는 시간 대중과 함께 했지만 그가 남긴 추억은 진하다. 팬들은 다시 한 번 작품으로 그를 만나고 싶다. 스포츠동아DB

■ 영원한 청순의 아이콘 ‘심은하’

‘마지막 승부’로 청순 대명사 등극
‘M’의 녹색 눈동자는 아직도 섬뜩
‘8월의 크리스마스’로 연기에 눈떠
배우 입지 굳힌 ‘미술관 옆 동물원’
‘청춘의 덫’ 등 흥행작 남기고 은퇴
16년 지난 지금도 팬들 컴백 기대

명멸하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서 유난히 반짝였던, 그래서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또렷하게 추억되는 별들이 있다. 안방극장과 스크린, 무대 위에서 당대 대중과 함께 교감했던 이들. 스포츠동아가 그 반짝인 별들의 자취를 새롭게 찾아 나선다. 그들의 작품과 거기 담긴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과 여정을 따라가며 추억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청순함과 당돌함, 처연함과 팜파탈의 진한 감성. 그 사이를 오가며 1990년대 여배우의 이미지를 장악했던 심은하(44). 이제는 두 딸의 엄마이자 정치인의 아내가 된 그는 미술가를 꿈꾸기도 했다. 무대를 떠난 지 1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연기자로서, 배우로서 기억되고 있다. 잦은 복귀설이 실제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 정다슬(마지막 승부):‘심은하=청순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

세 자매의 맏이로 어릴 적 고집이 세 ‘심통’이라 불린 소녀. 21살이던 1993년, 부모 몰래 MBC 공채 탤런트 22기 시험에 응시했다. 수험번호 577번. 친구와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 서류전형을 통과했고 6월16일 합격자로 세상에 이름을 냈다. 석 달 만에 ‘한지붕 세가족’의 문간방 여대생이 됐다. 단 두 달 만에 방을 비우고 훗날 자신과 함께 1990년대 스크린을 장악하게 될 한석규와 바통을 주고받았다.

그 직후 나선 무대, ‘마지막 승부’. 당초 이상아가 예정돼 있었지만 그 친구 역을 뽑는 오디션 도중 연출자 장두익 PD의 눈에 띄었다. ‘함초롬한 눈빛, 청순가련한 분위기, 무성형 동양미인의 얼굴’(1994년 1월30일자 동아일보) 덕분이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동건과 손지창의 사랑을 받는 청순한 국문과 여대생 정다슬을 풋풋한 모습으로 그려내며 시청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언론은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썼다.

당시 수입은 공채 탤런트로서 받는 30만원의 월급이 전부였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대중적 열기와 젊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트렌디한 드라마의 인기로 스타덤에 오르면서 몸값은 치솟고 또 치솟았다. 물론 당돌한 X세대에 관한 쏟아지는 담론 안에서도 ‘청순가련함’의 이미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 덕분이기도 했다.


● 박마리·김주리(M)

외과전문의. 청순함의 이미지를 떨쳐내고 톱스타로서 입지를 다지게 했다. 특히 1인2역으로 악령이 빙의되면 녹색 눈동자에 중저음의 목소리로 시청자에게 섬뜩함을 안겼다. 드라마는 낙태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화제를 모았고 52.2%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마지막 승부’에 이은 흥행으로 1994년 MBC 연기대상 여자신인상,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캐스팅 변경을 요구하는 방송사에 맞서 “나도 빠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이홍구 작가의 노력도 그 힘이 됐다.

하지만 키스를 통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역할과 연일 계속되는 밤샘 촬영 등 탓에 몸무게가 5kg이나 줄고 위장에 이상을 느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 무엇보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집중적인 시선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을 터이다. “연예인도 한 사람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풍토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회사원이나 은행원처럼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택한 것뿐이다”(1994년 10월6일자 경향신문)라고 말했다.


● 다림(8월의 크리스마스)

고즈넉한 소도시의 주차단속원. 시한부 삶을 사는 사진관 주인 한석규와 애틋한 사랑을 연기하며 호평 받았다. 아직 연기력보다는 ‘스타성’만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 무대이자 캐릭터이다. 여백 가득한 풍경과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허진호 감독의 재능도 어우러졌다. 드라마를 통해 굳힌 위상을 스크린으로 확장하려 했지만 ‘아찌아빠’와 ‘본 투 킬’은 흥행에 실패한 뒤였다.

김지미, 최은희, 엄앵란(1950∼60년대 초)의 시대와 문희·윤정희·남정임의 1960년대 및 정윤희·유지인·장미희의 1970년대 이른바 ‘트로이카’ 시대를 지나 1980년대 이후 강수연, 이보희, 원미경, 이미숙, 심혜진 등의 계보를 이으며 전도연·이미연·고소영과 함께 다시 새로운 여배우의 시대를 열었다.

그 2년 전인 1996년 8월31일자 경향신문은 심은하와 인터뷰 끝에 “평생 연기를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언젠가는 한계를 느낄 것이다. 정점에 서면 말이다. 그때는 미련없이 다른 길을 찾아 훨훨 떠날 것이다”는 그의 말을 전했다. ‘본 투 킬’의 실패에도 여전한 인기의 정점에서 단막극인 KBS 1TV ‘신 TV문학관’을 선택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말은 현실이 되었다.


● 춘희(미술관 옆 동물원)

결혼 비디오 촬영일을 하는 여자. 갓 제대해 실연당한 남자(이성재)가 자신의 집으로 우연히 찾아들어 좌충우돌하며 사랑에 관한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며 변화해간다.

그런 듯 현실에서도 더욱 완숙한 배우로서 자리를 굳혔다. 캐릭터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배우 본연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바탕은 책이었다. 그해 12월의 어느 날 한 신문(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책이란 취향과 기억을 담은 그릇이면서 경험의 일부가 된다”며 한 관객이 “심은하 맞아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저 춘희에요”라고 답했다고 술회했다.


● 서윤희(청춘의 덫)

1999년 SBS 연기대상을 안겨준 마지막 드라마 출연작이자 캐릭터.연인에게 버림받고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처절함을 담은 “당신, 부셔버릴 거야”라는 대사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어쩌면 심은하 연기의 또 다른 백미로 꼽힐 수도 있을 터이다. 청순함의 상징이었던 다슬이로부터 출발해 그 속에 감춰뒀던 더 없이 차가운 눈빛을 발할 때, 이미 그 한없이 가변적인 매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6살이던 1978년 김수현의 원작을 보며 21년 뒤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의 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추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배우로서 완숙한 면모를 과시하던 그때, 동양화를 배우고 싶다는 희망도 드러냈다. 그 4년 뒤 실제로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전시회에서 해송을 그린 두 점의 채색 수묵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인터뷰’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한 뒤 2003년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결행하기도 했던 재능이었다.


● 채수연(텔 미 썸딩)


박물관 유물 연구원.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 한석규와 호흡을 맞췄고 1997년 ‘접속’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장윤현 감독과 만나면서 개봉 전 이미 화제가 됐다. 장 감독은 “카메라가 돌아가면 180도 변했다”며 “같은 장면을 8번 정도 촬영했을 때 같은 지점에서 똑같은 눈물을 만들어냈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그만큼 6년이라는, 어쩌면 짧은 연기 생활에 불가능할 수도 있는 연기력으로 가히 ‘명불허전’의 솜씨를 뽐냈다.

이경후 기자 thiscas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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