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소원 들어주고 제살 내어주고…아낌없이 주는 바위

입력 2016-11-2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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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동마을의 무당바위는 예부터 소원을 이뤄준다 해 소원바위로도 불렸다. 과거 형체와는 조금 달라졌지만 무당바위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18 포두면 세동마을 ‘무당바위’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숫기없는 노총각·젊은 과부의 설화
영험한 바위로 일대에 소문이 자자
30년 전만해도 무속인들로 장사진
마르지 않는 샘 덕분에 농사도 짓고
일부는 잘려 나가 학교건물 자재로

전남 고흥은 바다의 고장이자 산과 바위의 마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시선 닿는 곳마다 너른 바다가 물결을 넘실댄다. 굽이굽이 산과 산도 이어져 있다. 다도해라고 불리는 바다 위 크고 작은 섬, 깊이를 알 수 없는 산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지금도 고장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이자 전설이 됐다.

첩첩 골짜기로 둘러싸인 고흥군 포두면 세동리 세동마을은 ‘세동(細洞) 서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이 대다수다. 이 마을에서 시작돼 수십년 동안 이어진 설화는 이들의 자부심 섞인 이야깃거리로 내려오고 있다.

‘소원바위’라고 불린 무당바위

11월 중순 세동마을, 유자 수확에 한창이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다란 마을길에는 부족한 일손 탓인지 채 거두지 못한 유자가 뒹굴고 있다. 예부터 햇볕 잘 들고 물 맑은 마을에는 유자가 유독 잘 자랐다고 한다.

세동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서영옥(70)씨는 마을이 무탈한 것이 “무당바위 덕분”이라고 믿는다. 아버지대부터 이어진 설화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면서 그의 마음에도 자연히 믿음이 생겼다. 마을사람 누구나 무당바위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무속인들이 바위를 앞에 두고 꽹과리와 징, 장구를 두드리며 소원을 비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을 정도다. 마을 서제섭 이장은 “무당바위의 영험함은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사람들을 믿게 하는 어떠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꼭대기에 우뚝 자리한 무당바위는 높이가 5M에 이른다. 그 자체로 ‘돌산’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위용이다. 나무 덤불과 넝쿨에 둘러싸여 있어 언뜻 보면 바위라기보다 큰 나무숲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동마을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바위가 서 있는 곳만큼은 ‘진주곡’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서 이장은 “한 덩어리로 된 무당바위가 진주 보석처럼 보이지 않느냐”며 “진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진주곡은 세동마을의 옛 이름인 원세동과 또 다른 마을 장촌 그리고 양지마을 세 곳이 만나는 골짜기를 일컫는, 고장 사람들만의 약속된 지명이기도 하다.

무당바위는 젊은 남녀가 몰래 만나는 비밀장소로도 통했다. 구전 설화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숫기 없는 노총각과 남편을 여읜 젊은 여자의 밀회’는 무당바위를 타고서도 지금껏 흐르고 있다. 이로 인해 무당바위를 찾아 소원을 비는 이들 중엔 유독 혼기를 놓친 처녀총각이 많았다.


● 마르지 않는 샘…설화가 이어진 힘

무당바위가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것은 그 밑에서 터져 나오는, 마르지 않는 샘 덕분인지도 모른다. 무당바위 설화의 발원지인 샘에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나와 인근 논밭을 적셔왔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부터 세동마을 일대는 7∼8월이 되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래도 무당바위 샘만큼은 마른 적이 없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논농사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바위 아래 펼쳐진 넓은 땅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논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지금은 마을에 저수지가 생겨 더는 무당바위 샘물을 논농사에 쓸 필요가 없게 됐다. 무당바위 앞에서 만난 서영옥씨는 50여년 전 마을 저수지 축조에 힘을 보탠 사람 중 한 명이다. “열대여섯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돌을 날라 저수지를 만든 뒤부터 논농사 물대기 걱정이 사라졌다”는 그는 “저수지가 생겼어도 한동안 무당바위샘은 동네 아이들의 물놀이터로 쓰였다”고 했다. 설화는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당바위도 과거 모습과는 조금 달라졌다. 1960년대 마을 인근에 설립된 포두초등학교의 석조건물 건립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무당바위 일부가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무당바위로 어린 학생들의 소원을 이뤄주자’며 기꺼이 한 뜻을 모았다. 그리고 바위를 직접 날라 손수 학교를 세웠다.


● TIP 설화란?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고흥(전남) |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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