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나무엑터스
데뷔 18년차 배우 문근영이 연극 무대에서 ‘급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카메라가 극적 효과를 더해주는 매체 연기와 달리 배우 스스로가 카메라처럼 관객들을 사로잡아야하는 무대 연기가 문근영에게 주어진 난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족한 점이 오롯이 드러나는, 어쩌면 18년 배우 인생에 오점이 될 수도 있는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문근영이 연극 데뷔작 ‘클로저’ 이후 6년 만에 선택한 연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순수한 줄리엣과 문근영 특유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어우러져 관객들은 줄리엣이 이야기하는 사랑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문근영은 ‘클로저’ 때와 달리 무대가 지닌 책임감을 깨달았다. 그는 “‘클로저’ 때는 마냥 ‘나도 무대에 서고 싶어’였다. 지금은 무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관객과 호흡한다는 것, 연극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조금은 알았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도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자신감 있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로미오와 줄리엣’에 임하는 각오를 말했다.
그는 ‘급의 차이’까지 느끼면서 여전히 연기를 공부하고 있었다.
“저는 무대 경험도 부족하고 무대 연기도 부족해요. 제가 선택한 길인데 문득 내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구나 싶기도 했죠. 요즘은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요. (웃음) 다른 배우들과의 급 차이를 느끼니까 위축돼 있어요. 근데 스스로를 벼랑 끝에 매달아놓고 살려달라고 하는 건 너무 웃기잖아요. 자신감을 갖고 연기를 해야 관객들도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고 좌절하는 시간까지 줄이고 있어요. 순간순간이 아까워서 미칠 거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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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문근영은 무대에 대한 걱정을 늘어놨지만 표정은 참 행복해보였다. 스스로를 “변태 같다”고 말할 정도였고 듣는 이 입장에선 상황을 충분히 즐기는 중이었다.
“변태 같아요. (웃음) 요즘 공포를 즐기고 있거든요. 죽어도 무대에서 죽자는 마음이고 자괴감에 빠져도 눈물 흘릴 시간도 없어요. 그 시간에 대본을 한 번이라도 더 봐야하거든요. 너무 변태 같지만 좌절, 공포가 저를 미치도록 즐겁게 하죠.”
연기대상까지 받은 문근영의 입에서 이 같은 답이 쏟아진 게 의외였다. 문근영은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걸 이뤄놓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계절을 예로 들며 “속도만 다를 뿐이다. 일찍 시작했다고 해서 더 많은 걸 갖고 있지는 않다”고 ‘인간’ 문근영의 속내를 조심스레 꺼내 보여줬다.
“봄, 여름이 일찍 오면 가을이 늦게 오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굳이 비유하자면 저한테 봄, 여름이 일찍 왔을 수도 있지만 가을은 아직 안 오고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일찍 시작했다고 해서 뭘 많이 갖고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철이 오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죠. 저는 10대에 철이 들었던 모습으로 20대를 맞이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직급이 올라가는데 저는 정체돼 있었고 비슷한 20대를 보냈죠.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서른이든 마흔이든 나이에 맞는 제철이 올 거라고 봐요. 그 전까지는 철없이도 살아보려고 하고요.”
사진제공=샘컴퍼니
변화를 원하는 문근영은 스스로 우물 밖으로 나가는 ‘큰 노력’을 통해 2016년을 바쁘게 보냈다. 그는 “올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거 같다.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변화하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저는 굉장히 폐쇄적으로 살아왔어요. 집순이기도 하고 사람도 많이 안 만났죠. 무언가를 선택할 때 오랜 시간 고민하고 걱정해요. 불안정하게 살았었는데 올 초에 갑자기 우물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진 거예요. 사람들과도 교류 해보고 주체적으로 살자는 마음이었죠. 실천으로 옮긴 덕에 박정민(로미오 역)도 만날 수 있었어요. 연극을 함께 하기 전 올 4월에 어떤 모임에서 먼저 만났었거든요. 원래의 저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는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뭐라고 하하. 큰 용기를 냈어요. 제 딴에는 기특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문근영은 2017년 서른 한 살이 된다. 본격적으로 30대를 시작하는 소감을 묻는 질문을 했지만 그는 “서른하나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오직 제 머릿속에는 지금 무대 언어와 줄리엣 뿐이거든요. 크리스마스가 뭐죠? 연말, 연초는 또 뭔가요? 하하”라며 마지막까지 걱정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근영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2016년 12월9일부터 2017년 1월1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동아닷컴 전효진 기자 jhj@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