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내숭녀’로 세계를 녹일래요

입력 2017-04-21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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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은 나의 자화상”이라는 김현정 작가가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작품 속 인물은 나의 자화상”이라는 김현정 작가가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유리구두로 왕자를 낚는 신데렐라 등
내숭녀 전시회 美·독일·中서도 호응
“내숭녀 모델? 처음엔 싫었던 사람들
지나고 보니 어느새 나의 자화상…”

“왜요?”, “왜 그런데요?”. 유독 질문이 많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무례하다”고 할 정도로 묻고 또 물었다. 하기 싫은 걸 시키면 울며불며 데굴데굴 고집을 피웠다. 호기심쟁이에 똥고집쟁이인 여자아이를 집중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여자아이는 세상이 알아주는 화가가 되었고,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20대 후반 여인의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 있었다.

한국화가 김현정(28) 작가는 최근 미국 유력 경제매체인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에 선정됐다. 빅뱅의 지드래곤,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배우 김수현 등 연예, 스포츠 스타들은 제법 있었지만 국내 순수 미술작가로는 김현정이 처음이다.

김현정 작가는 ‘내숭’이라는 주제로 한 작업을 끈질기게 이어온 작가다. 작가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젊은 한복을 입은, 20대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여성은 우아하고 단아한 한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일탈을 선보인다. 한복을 차려입고 맥도날드 햄버거 배달 스쿠터를 모는가 하면, 당구장에서 일명 ‘맛세이’를 치고 있다. 양은냄비에 끓인 라면을 뚜껑에 올려 먹다가 자신의 명품 백에 스타벅스 커피가 쏟아지는 모습을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차’라는 작품도 유명작이다. 이 모든 작품이 ‘내숭’ 시리즈다.
대표작 ‘아차’.

대표작 ‘아차’.



● “화가가 배고파야 할 이유가 있나요?”

김현정 작가는 연예인보다 더 바쁘고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내고 있다. 그런 그에겐 ‘한국화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도 어색할 게 없다. 김작가는 ‘좋은 작품은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주겠지’하며 뒷짐 지고 창밖만 바라보는 타이프의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화가는 1인 창업”이라고 주장하는 당돌한 작가다. 서울대에서 동양화과를 다니며 경영학을 복수전공했다.

“내가 그린 그림의 엄마는 나다. 내 새끼들이 어떻게 크고, 어디로 입양되어 가고, 어디서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이 일을 시작했다. 결혼으로 치면 웨딩업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하는 셀프웨딩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그린 작품을 누가 구매하고, 어디서 어떻게 전시되는지가 궁금해 시작한 것이 ‘1인 창업’이었다는 얘기다. 김현정은 “화가가 꼭 배가 고파야 할 이유는 없다”고 단정했다. 그렇다고 그림으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전시를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이 김현정이 생각하는 ‘화가가 배가 고프면 안 되는 이유’의 최소 한계선이다.

김현정 작가의 전시회는 “재밌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2014년 ‘내숭 올림픽’은 가나인사아트센터 개관 이후 최다관객이 들었다. 2016년 3월에 열린 ‘내숭 놀이공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27일 동안 6만7402명이 다녀갔고, 하루 평균 방문객은 2496명으로 집계됐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객석을 꽉꽉 채울 만한 수의 관객이 매일 전시회장을 찾은 셈이다.

김현정 작가는 이제 해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미국 뉴욕에 이어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회, 강의 등을 진행했고 중국도 다녀왔다.

“문화전도사로서의 마음이랄까. 한복을 정말 좋아한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입을 수 없을 것이다. 내숭 이야기 속에는 서울 여자 이야기가 다 들어있지 않나. 보여주고 싶다.”

김작가는 ‘창업주’답게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미술시장의 규모는 2000억원 수준으로 작다. 김작가는 “그런데 매년 2만명의 미대생이 졸업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답은 해외마켓에서 찾아야한다는 것. 문제는 서울 내숭녀의 이야기가 해외 관객에게도 먹힐까 하는 것이었다. 대표작인 ‘아차’만 해도 그렇다. 라면과 스타벅스 커피의 대비가 이 작품의 포인트인데 외국인에게는 반대의 감성으로 다가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라면은 비싼 간식이고, 스타벅스는 매일 마시는 부담없는 데일리커피일 뿐이다. 그래서 김현정 작가는 디즈니 시리즈를 그렸다. 거울 대신 인스타그램 앞에서 셀피를 찍는 백설공주, 미녀와 명품 쇼핑백을 잔뜩 든 야수, 유리구두를 미끼로 삼아 왕자를 향해 낚싯대를 드리우는 신데렐라는 해외 미술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내숭녀로) 그렸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자화상으로 변해가는 걸 발견하고 괴로웠다. 싫었던 사람들이 결국은 내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모든 것이 해결됐다. 취업, 결혼. 청춘들에게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시대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좋아하는 분야에서 조금은 더 끈기있게 버틸 수 있는 힘을 보태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현정에게 물었다. 처음엔 미워하는 사람들로 내숭녀를 그렸다는데, 당사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김현정이 정말 해맑게 웃었다. “아직 모르고 있죠.”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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