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옥자’ 기자회견에서 ‘소녀’ 캐릭터의 등장에 대한 질문에 답한 말이었다. 봉준호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소녀와 여성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아파트 옥상에서 누군가 개를 집어던지는 모습을 보고 범인을 잡기 위해, 또 아파트 주민 윤주(이성재)의 반려견 ‘순자’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던 배두나(박현남 역)이 그랬고 ‘괴물’에게 빠져나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고아성(현서 역)이 그랬다. ‘옥자’에서 안서현도 그렇다. 봉준호의 소녀들은 그렇게 뛰고 또 뛴다.
● ‘88만원 세대’들의 현실과 희망…‘플란다스의 개’ 배두나
‘플란다스의 개’에서 박현남(배두나 분)은 88만원 세대로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원이다. 그의 꿈은 ‘용감한 시민상’을 받아보는 것이다. 흉기를 든 강도를 때려잡는 은행직원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한 스타의 첫 사랑이라는 장난 전화에 황급히 일어나 새벽에 방송국에 가려고 채비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뚱녀’(고수희 분)와 함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가 반대편 아파트에서 개를 던지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이에 현남은 그를 쫓기 위해 질주를 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현남은 허황된 꿈을 꾸는 청춘이자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였다. 극 중에서 아파트 옥상에서 개를 던지는 남자를 잡는데 실패했지만 아파트 주민 윤주의 반려견인 ‘순자’를 부랑자(김뢰하 분)에게서 구해내고자 노란 후드티 끈을 질끈 묶고 아파트를 종횡무진하며 달린다. 이 때 마치 국가대표를 응원하듯 노란색 옷을 입고 현남에게 꽃가루를 뿌리는 ‘환상의 응원단’의 모습이 ‘88만원 세대’를 향한 희망의 응원가를 보내는 듯 하다. 배두나는 약간의 정의감을 갖고 있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엉뚱하게 표현해내며 주목받기도 했다.
● “아빠~”…피하고 싸우고 보호하는 ‘괴물’ 고아성
‘괴물’에서 현서(고아성 분)는 가족에게 돌아가려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소녀이다. 매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서민 박강두(송강호 분)의 딸인 현서는 갑자기 나타난 괴생명체에 잡힌다. 다행히 죽임을 당하지 않은 현서는 아빠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며칠 후 세주(이동호 분)가 자신처럼 산 채로 괴물에게 잡혀온 것을 보게 된다.
현서는 사회시스템의 희생양이자 모성애를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어딘지 모르는 한강 하수구 어딘가에 갇힌 현서는 자신보다 어린 세주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극 중에서는 현서를 구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해 한강으로 돌진하는 가족들의 분량이 많지만 현서 역시 괴물을 피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다. 특히 괴물에게 잡히고 피보호자에서 보호자가 된 현서는 세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모성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 “옥자야, 나 여기 있어!”…베스트 프렌드 찾아 미국까지 간 안서현
봉준호 작품 속 소녀들 중 정의감과 우정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 중 ‘미자’(안서현 분)은 최강의 인물이다. 대한민국 어느 깊은 산 속에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분)와 함께 살고 있는 미자는 ‘슈퍼돼지’ 옥자를 키우고 있다. ‘옥자’는 미국 ‘미란도 그룹’에서 식량난 해결을 위해 자연적 돌연변이를 교배시켜 태어난 동물. 10년 장기 프로젝트 대상인 ‘옥자’는 미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미란도 그룹’ 직원들로 인해 미국으로 끌려가게 된다.
옥자를 찾기 위해 미자는 서울 한복판과 뉴욕 시내를 호기롭게 다닌다. 건물 유리창을 겁 없이 깨트리고 옥자가 타고 있는 트럭을 향해 용감무쌍하게 뛰어간다. 난생 처음 가보는 뉴욕에서도 ‘비밀 동물 보호 단체’와 옥자를 되찾으려 돌진한다. 미자와 옥자의 사랑 사이에는 ‘자본주의’가 부딪히게 된다. 미란도 자매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미자는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다. 이에 미자가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맞서고 옥자를 되찾는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