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개봉한 영화 ‘걸캅스’의 라미란. 영화 첫 주연이라는 사실이 주는 부담과 책임이 상당하지만 “시켜 줄 때 후회없이 해보자!”면서 웃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배우 라미란(44)에게서는 ‘긍정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어김없이 특유의 유머감각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겉으론 덤덤해 보였지만 속에선 엄청난 에너지가 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예전보다 작품도 많이 하고, 알려지다 보니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일 때가 있었어요. 그런 과정도 다 지나갔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내가 행복하면 되지.(웃음) 그걸로 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케 세라 세라’(어떻게든 되겠지) 해요.”
● 영화 첫 주연…“내 인생에 이런 일도”
라미란이 9일 새 영화를 내놓았다. 여성 투톱 형사물 ‘걸캅스’(감독 정다원·제작 필름 모멘텀)이다. 연극 무대를 거쳐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스크린으로 영역을 확장한 그는 14년간 다양한 작품을 소화해왔지만 영화를 온전히 이끄는 주연의 책임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주연영화’라는 수식어가 라미란에게 설렘과 동시에 책임과 부담을 안기고 있다.
“제 인생의 흐름에서 이런 과정이 있네요. 2014년 무렵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우정출연으로 잠깐 나올 때였는데 당시 영화 제작사 대표님이 저를 주인공 삼아서 영화를 찍고 싶다는 거예요. 당연히 농담인 줄 알고, 제대로 듣지도 않았죠.”
그로부터 2년쯤 지나고 ‘걸캅스’ 시나리오가 진짜 라미란의 손에 전해졌다.
“놀랐어요. 대표님이 꾸준히 작품을 준비한 것도 놀라웠는데, 저를 두고 액션영화를 구상했다니 더 놀라울 수밖에. 젊은 남자 배우에게 갈법한 시나리오잖아요. 아니 나한테 왜? 나이 많은 ‘아줌마’인 나한테 왜? 하하!”
‘걸캅스’는 한 때 베테랑 형사였지만 결혼과 육아로 인해 지금은 경찰서 민원실에서 일하는 미영과 그의 시누이이자 마음만 앞서 사고치기 일쑤인 젊은 형사 지혜가 우연히 맞닥뜨린 디지털성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이야기다. 라미란은 미영 역을 맡아 지혜 역의 이성경과 화끈한 ‘투 톱 플레이’를 펼친다.
한국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여성 형사물이라는 사실, 여성을 상대로 자행되는 디지털성범죄를 통쾌하게 응징하는 이야기가 낳는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이에 더해 라미란은 특유의 코미디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면서 곳곳에서 웃음을 만든다.
“제 출연 분량이 적었다면 허세 떨면서 덤볐겠죠. 워낙 영화 일 자체를 늦게 시작해서인지 제가 액션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동안 주로 코믹한 캐릭터로 소진해 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의아한 상태로 ‘걸캅스’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할 수 있을까, 했지만…. 해야죠. 해야 했어요.(웃음)”
영화에서 라미란은 액션 연기도 거뜬히 소화한다. 극 중 ‘전직 레슬링선수’라는 설정 때문인지 날렵한 액션보다는 우직한 액션을 주로 소화한다. 이를 두고 라미란은 “실현 가능한 액션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액션 난이도가 그리 세지 않아요. 실현 가능한 정도? 하하! 제가 하는 건 휘황찬란하지 않은,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액션이잖아요. 남편(윤상현)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 시절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영화 ‘예스 마담’과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하하하!”
9일 개봉한 영화 ‘걸캅스’의 라미란. 영화 첫 주연이라는 사실이 주는 부담과 책임이 상당하지만 “시켜 줄 때 후회없이 해보자!”면서 웃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통쾌한 오락영화이지만 사건 대할 땐 진지할 수밖에”
‘걸캅스’는 디지털성범죄를 주요 소재로 다룬 까닭에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버닝썬 사태와 맞물려 자주 거론되고 있다. 실제 사건을 빼닮은 이야기가 영화에 여러 번 등장하는 탓도 크다. 개봉 전부터 곳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분석과 평가를 두고 라미란은 “일단 와서 봐 주길 바라고, 관객들에게 경각심을 자극할 수 있다면 영화의 몫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걸캅스’를 찍을 때 ‘내가 힘들 때 옆집 언니가 나서서 도와줬다’, 그런 마음으로 임했어요. 그런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를 각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을 가졌죠.”
영화에서 디지털성범죄 행태를 목도한 라미란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일단 행동한다. 성범죄 가해자를 잡고 말겠다는 신념이 누구보다 강하다.
실제 라미란도 가끔 ‘분노’할 때가 있다. “내가 한 말이 왜곡돼 해석될 때”, “내 의도와 전혀 다른 반응을 접할 때” 주로 그렇다.
“일일이 반박하고 싶은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저와 다른 의견을 내는 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죠. 다만 제 말이 왜곡될 때는 많이 답답하지만 수용해야죠. 저는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이니까,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라미란은 그 ‘흔한’ SNS 활동도 하지 않는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람들이 아는 게 싫다”는 이유에서다. SNS에 관해서만큼은 단호했다.
“제 일상에 대해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요.(웃음) 저는 평범한 사람이고, 제 생각을 막 펼치고 싶지 않거든요. 조용히 살고 싶어요. 세수도 안하고 동네 마트에 막 돌아 다녀요. 그렇게 장보러 가면 아주머니들이 알아보고 사진 찍어달라고 할 때도 있는데 ‘안돼요, 나 눈곱도 안 땠단 말이야~’ 그러죠.”
연극무대부터 시작해 영화를 거쳐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으로도 활동 무대를 넓힌 라미란은 이젠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는 ‘인기 배우’가 됐다. 30대 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40대에 전성기를 맞은 ‘대기만성’ 배우다. 그는 “꿈이 있다면, 평생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극 무대에선 감초 역할을 주로 했는데 ‘친절한 금자씨’에서 웃음기 없는 역할을 처음 했어요. 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영화 쪽 분들이, 그런 역할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더라고요. 새로웠죠. 그 뒤론 닥치는 대로 했어요. 한 장면 나오는 단역도 하고, 손만 나오는 영화도 하고요.”
라미란은 그런 과정을 통해 “연기의 재미를 찾았다”고 돌이켰다. 지금도 자신의 연기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지만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이고, 일단 시켜줄 때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늘 지금 같은 수는 없겠죠. 배우가 ‘인생작’을 한 번 만날까, 말까, 그렇잖아요. 기다리고 있어요. 늘, 다음에 출연하는 작품이 ‘인생작’이길 바라죠.(‘걱정말아요 그대’의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어떤 의미가 있죠~. 그렇지 않나요? 하하!”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