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골퍼 노승열이 2일 제대를 마친 뒤 강원도 속초시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활짝 웃고 있다. 1년 8개월 동안 필드를 잠시 떠났던 노승열은 이달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 뒤 9월 복귀전을 치른다. 속초|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2014년 PGA 투어 첫 우승 후 슬럼프
두려움 생겼지만, 지금은 자신감으로 가득
군복을 막 갈아입고 마주한 ‘예비역 병장’은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는 ‘경주마’ 같았다.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을까.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필드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2017년 11월 입대 후 1년 8개월 동안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노승열(28)을 스포츠동아가 처음으로 만났다. 갓 제대 신고를 마친 2일, 강원도 속초시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노승열은 “솔직히 말하면 입대 직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경기를 많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관심이 되살아나더니 나도 모르게 마스터스와 US오픈, 디 오픈을 찾아서 챙겨보게 됐다”고 멋쩍게 웃었다.
주니어 시절 ‘골프 신동’으로 주목받으면서 각종 대회를 제패했던 노승열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곧장 아시안 투어로 직행했고, 17살이던 2008년 미디어 차이나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이어 2010년 말레이시아 오픈 우승을 통해 유러피언 투어까지 접수하더니 2014년 PGA 투어 취리히 클래식에서 정상을 밟고 오랜 꿈을 이뤄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7년 입대를 통해 현역 무대를 잠시 떠났던 노승열은 “그동안 인터뷰가 참 그리웠다”는 말로 복귀를 향한 설렘을 대신했다.
프로골퍼 노승열이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모 부대에서 제대 신고를 마친 뒤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고성|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 “동료들 보니 연습을 거를 수 없겠더라고요”
-먼저 제대를 축하한다.
“어느덧 1년 8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이었다. 일단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예비역 병장’이 돼서 기쁘다.”
-본인의 군 생활은 원래 오래 느껴지는 법인데.
“짧지는 않았다.(웃음) 그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이후로 줄곧 한길만 파왔는데 군 생활을 하면서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됐다. 골프와는 상관없는 사람들과 지내며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재정비하는 기회도 됐다.”
-본인에겐 어떤 1년 8개월이었나.
“사실 군 복무를 시작하면서는 골프를 잠시 잊으려고 했다. 입대를 앞둔 시점에서 심각한 허리 부상이 찾아왔었고, 더군다나 입대 직후에는 오른쪽 대퇴사두근을 다쳐서 깁스까지 하게 됐다. 골프는커녕 재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연습을 꽤 오래 건너뛰었겠다.
“초반에는 골프연습장 대신 헬스장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3월까지는 재활에만 매진했다. 그러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
-계기가 있었나.
“PGA 투어 경기를 보면서였다. 다른 선수들의 모습을 보니까 내 몸이 근질근질해지더라. 집에만 있으려니 도저히 마음도 편치 않았고…. 결국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클럽을 잡았다. 다행히도 나는 일과(상근예비역) 전후로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새벽마다 1시간씩 달리기와 기초 체력 운동을 병행했고, 일과 후에는 2~3시간 정도 근력 운동을 하면서 몸을 키웠다. 샷 연습 역시 거르지 않았다.”
프로골퍼 노승열이 2일 제대를 마친 뒤 강원도 속초시의 한 카페에서 바닷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속초|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 “받은 만큼 베풀어야죠”
노승열은 군 복무가 한창이던 올해 4월 고향에서 큰 아픔을 안았다. 속초시와 고성군 일대를 덮쳤던 대형 산불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고향집 일부가 타는 등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장면은 자신의 고향이 새까맣게 변해 버린 모습이었다.
-4월 큰 아픔이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 살면서 그토록 거센 바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날 저녁 6시 즈음, 갑자기 산불이 났다는 긴급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이후 상황은 어땠나.
“가족들과 함께 부랴부랴 집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미 그때부터 잿더미들이 차 앞으로 날아오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결국 불이 잦아든 그 다음 날 새벽 3시경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앞 마당과 뒤편 창고가 다 타버린 뒤였다. 그나마 우리 가족의 경우 집 자체는 큰 피해가 없었다. 다른 이웃들은 집 전체가 타버린 곳이 많았다….”
-산불 직후 성금을 기부했다.
“사실 내 직업은 무언가를 주기보다는 받기가 익숙한 삶이다. 그래서 프로가 된 뒤로 스스로에게 약속 하나를 했다. 내가 받은 과분한 사랑을 되돌려주자는 다짐이었다. 산불로 피해를 입은 지역은 내가 나고 자라고, 또 프로골퍼로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 준 곳 아닌가. 비록 수입이 없을 시기였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프로골퍼 노승열(오른쪽)이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모 부대에서 소집해제 신고를 마친 뒤 아버지 노구현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성|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 “두려움 가득했지만, 이제는 자신감뿐입니다”
노승열은 주니어 시절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2005년 14살 나이로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 최연소 우승자가 됐고, 같은 해 이를 발판 삼아 최연소 국가대표 타이틀까지 얻었다. 2010년 아시안 투어 최연소 상금왕의 주인공 역시 노승열이었다. 다만 2014년 PGA 투어 첫 정상 등극 이후 아직 우승 트로피를 추가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한국인 역대 4번째 PGA 투어 우승자가 됐다.
“취리히 클래식에서였다. 그저 기쁜 순간이었다. 이날만을 보고 골프를 계속해왔는데 마침내 꿈을 이루지 않았나. 그런데 그때 한 선배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주셨다. 기쁨은 잠시뿐이라는 충고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승은 또 하면 된다’고 자만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취리히 클래식 이후 우승과 멀어졌다.
“프로 데뷔 후 몇 년 동안은 긴장이나 부담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우승을 하고 나니 나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부담감이 생겼다. 필드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제야 그 선배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
-이번 제대가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20년 가까이 골프만을 보고 살았다. 어릴 적 동해 바닷가를 끝도 없이 달렸고, 백사장에서는 수도 없이 벙커샷을 연습했다. 프로에서도 연습을 거르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그친 이유는 하나다.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 욕심이 조금 과했다. 입대 전 허리 부상도 이러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간 내 몸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현역 생활을 잠시 쉬면서 몸 상태가 좋아졌고, 지금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크다.(웃음)”
-그 자신감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근육을 키우니 드라이버 비거리도 덩달아 늘어났다. 일단 몸무게는 기존 75㎏에서 81㎏로 불었고, 드라이버 캐리는 290야드 정도에서 305~310야드로 늘었다. 최근 PGA 투어에서 압도적인 힘을 앞세운 선수들이 많이 생겨난 만큼 나 역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
-9월 필드 복귀를 앞두고 있다.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 투어 몇몇 대회에서 감사하게도 나를 초청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까지 착실히 연습해서 팬들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또 현재 PGA 투어 유예 시드로 26개 대회를 출전할 수 있는데 이는 신중하게 활용할 계획이다.
“세계랭킹? 흠, 잘 모르겠다.”
-현재 기준으로 1951위다(입대 직전이었던 2017년 11월 순위는 267위).
“와 정말 많이 떨어졌다. 이제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하하.”
● 노승열은?
▲ 생년월일 = 1991년 5월 29일
▲ 신체조건 = 신장 183㎝·체중 81㎏
▲ 출신교 = 교동초~고성중~경기고~고려대
▲ 소속사 = 스포티즌
▲ 프로 데뷔 = 2008년
▲ 우승 경력 = 2005년 한국주니어선수권·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 2008년 아시안 투어 미디어 차이나 클래식, 2010년 유러피언 투어 말레이시아 오픈, 2014년 PGA 투어 취리히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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