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화, 홍련’. 사진제공|영화사 봄
하얀 소복에 검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입가에는 한줄기 피를 머금은 모습. 상상 속 전형적인 처녀 귀신이다. 때마다 여름이면 잊지 않고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찾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주인공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시청자와 관객은 덕분에(?) 무더위를 잊는 희열을 맞봤다. 하지만 이젠 그것마저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한 서린 귀신이 피범벅으로 등장하지 않아도 요즘 세상은 납량 드라마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기도 하다. ‘납량특집’이라는 단어조차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에 떨게 하는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여기 있다. 각각 다섯 편의 역대 공포영화(흥행 순)와 안방극작 납량드라마(시청률 순)가 잠시나마 더위를 저 멀리 달아나게 해줄 것이다.
① ‘장화, 홍련’ (2003년·314만 명·배급사 집계)
16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 퇴색은커녕 오히려 높아만 가는 명성의 한국 공포영화 대표작이다. 고전 ‘장화홍련전’을 각색, 탁월한 영상미와 음악으로 재구성한 기획 및 김지운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서울에서 오랜 요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자매를 반갑게 맞이하는 새 엄마. 하지만 신경쇄약에 시달리는 새엄마와 자매의 관계가 악화할수록 자매는 환영과 악몽에 시달린다. 자매 역의 임수정과 문근영, 새엄마 염정아의 연기 대결이 압권. 단, 혼자 보는 건 ‘비추’. 불면에 시달릴 수 있다.
영화 ‘곤지암’. 사진제공|하이브미디어코프
② ‘곤지암’ (2018년·267만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유튜브 시대’와 함께 10여 년 동안 침체기를 겪은 한국 공포영화의 부활을 알린 작품이다. CNN 선정 ‘세계 7대 미스터리 장소’로 꼽힌 곤지암 정신병원을 모티프 삼아 그 현장을 찾아 나선 주인공들이 겪는 기이하면서도 섬뜩한 일을 담았다. 배우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1인칭’ 기법을 통해 관객이 흡사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효과를 낸다. ‘기담’부터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까지 공포 장르를 파고든 정범식 감독의 노하우가 집약됐다. ‘곤지암’의 인기 속에 부산 영도의 옛 해사고가 몸살을 앓기도 했다.
영화 ‘폰’. 사진제공|토일렛픽쳐스
③ ‘폰’ (2002년·220만 명·배급사 집계)
하지원이 한때 왜 ‘호러 퀸’으로 통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잡지사 기자인 지원(하지원)은 계속되는 괴전화를 피해 번호를 바꾸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011-9998-6644’라는 번호 외에는 선택되지 않는다. 이후로도 괴전화는 계속되고, 지원은 앞서 이 번호를 쓴 한 명은 죽고 또 다른 한 명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폴더 폰’ 시대의 공포영화. 아날로그 정서가 짙지만 휴대전화를 매개로 하나 둘 드러나는 사건이 자아내는 공포감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안병기 감독이 연출했다.
영화 ‘여고괴담’. 사진제공|씨네2000
④ ‘여고괴담’ (1998년·200만 명·배급사 집계)
공포영화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박기형 감독 연출로, 한국 공포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한 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 이에 얽힌 사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은영(이미연)은 졸업한 지 10년 만에 모교 교사로 부임하고, 그때부터 학교에선 누군가 죽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은영은 10년 전 학교에서 죽은 친구 진주(최강희)를 떠올린다. ‘여고’ ‘자살’ ‘질투’ 등 공포영화 주요 관객인 10대의 취향을 저격, 이후 시리즈가 5편까지 나왔다. 현재 김서형 주연 ‘여고괴담’ 리부트 시리즈 ‘모교’가 제작되고 있다.
영화 ‘여고괴담3 - 여우계단’. 사진제공|씨네2000
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여우계단’ (2003년·178만 동원·배급사 집계)
‘여고괴담’이 한국 대표 공포 시리즈로 공고히 자리를 굳히게 한 두 번째 영화이자, 시리즈로는 세 번째 작품. 학교 기숙사로 오르는 숲길에 층계로 된 계단이 있다. 여우계단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29번째 계단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준다. 저마다 간절함을 품고 소원을 비는 여고생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흥미롭다. ‘여고괴담’이 신인 발굴의 산실이란 걸 다시 증명했다. 송지효, 박한별, 조안이 주연을 맡았다. 윤재연 감독이 연출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