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란. 사진제공 | KLPGA
1986년 생으로 올해 나이 서른넷, 홍란(삼천리)이 걷고 있는 길이다.
2018년 3월 브루나이 레이디스 오픈을 마지막으로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지만 정규투어 통산 4승의 감격을 누렸다. 319번 출장 경기에서 2위를 차지한 건 5번. 톱5에도 30번 들었고, 수준급 성적의 잣대인 톱10에도 64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톱10에 오른 비율은 전체 출전 경기의 약 20%. 5번 나가면 그 중 1번은 톱10에 들었다. 단순히 오랜 기간 뛴 것뿐만 아니라 실력도 빼어나다는 것을 기록이 증명한다. 16시즌 동안 총 벌어들인 상금은 22억7787만5711원.
그러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시간이 흐르면서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부쩍 줄었다. 이번 시즌 평균 비거리는 205.5m, 전체 124위에 불과하다. 그보다 드라이버 거리가 짧은 선수가 몇 안 된다. 한창 멀리 나갔던 2014년 225.5m에 비한다면 정확히 6년 만에 20m가 줄었다.
거리는 줄고,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강하다. 7일 끝난 제10회 롯데 칸타타 여자오픈(롯데 스카이힐제주CC·파72)에선 1라운드(71타)~2라운드(67타)~3라운드(62타)~4라운드(74타), 합계 274타로 공동 5위에 올랐다. 새 시즌 3번의 대회 출전 중 가장 좋은 성적. 그러나 3라운드에서 개인 생애 최고 기록인 10언더파(62타)를 몰아치며 단숨에 공동 1위에 올랐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8일 연락이 닿은 그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3라운드 종료 후 “모든 선수는 우승을 목표로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공격적으로 플레이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최종 라운드를 돌아보며 “퍼팅이 잘 안 되면서 전체적으로 흔들렸다. 생각대로 플레이가 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후회하고 아쉽다고 한들 별로 도움 될 게 없다”면서 “마지막 18번 파5 홀에서 다행히 버디로 게임을 끝내 좋은 기분으로 다음 대회에 나설 수 있게 됐다”고 위안을 삼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소속으로 모처럼 KLPGA 투어에 출전한 동갑내기 지은희(34·한화큐셀)와 나눈 뒷얘기도 털어놨다. “은희하고 ‘하루에 몰아치면 안 돼’라고 말하며 서로 웃었다.” 지은희는 이번 대회에서 첫 날 9언더파를 몰아치며 공동 1위에 올랐다가 이후 주춤, 최종 10언더파 공동 17위로 대회를 마쳤다. 홍란은 어렸을 때 지은희와 2부에서 같이 뛰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2위, 지은희가 3위로 정규투어 시드를 획득했고 현재 무대는 다르지만 둘 모두 변함없이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휴대폰을 통해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지은희와 나눈 이야기를 전할 때, 이미 우승을 놓친 아쉬움은 털어버린 듯 했다. “페이스가 전반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시즌 초에 좋은 성적을 내면 자신감을 이어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승은 놓쳤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변함없이 꾸준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비결이라고까지 할 건 없을 것 같고…”라고 잠시 뜸을 들인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쉬는 날 클럽은 잡지 않아도 근력운동은 빠지지 않고 했다”면서 “큰 부상 없이 지금까지 투어 생활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두 번째로 꼽은 건 마음가짐. “쉴 때, 골프에 빠져있지 않으려 한다. 내 삶과 골프를 분리해서 밸런스를 잡으려고 노력한다.” 누구보다 ‘길게’ 투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오히려 더 오래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세 번째는 스폰서 덕분”이라고 했다. 메인 스폰서인 삼천리와 인연을 맞은 건 올해로 7년째. “삼천리는 홍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선수 양성에 목적을 두고 후원을 해 주신다. 만약 삼천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는 정말 큰 행운이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따로 매니지먼트사를 두지 않고 있음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제는 걸어온 길보다 남아있는 길이 짧은 게 냉정한 현실. 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실력이 안 된다면, 당연히 그만 두는 게 맞다. 내가 만약 시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끝이 온다면 순응할 것”이라는 말에는 프로로서 당당히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 순간까지 필드에 나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면서 마음 속 깊은 곳의 속내도 털어놨다.
“주변에선 400경기 출장을 목표로 하라고 하지만, 사실 난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300경기를 목표로 하다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니다. 400경기를 목표로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그 숫자에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골프가 하기 싫어질까 봐 그게 싫고 두렵다. 400경기에 뛰려면 앞으로 3년 이상 더 뛰어야 가능한 숫자다. 숫자에 목표를 두기보다, 언젠가 실력이 안 돼 은퇴하게 되더라도, 그 순간까지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