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인생 55년만에 세계의 별이 된 윤여정 “늙은 나를 건드리는 진심의 이야기 원해”

입력 2021-04-27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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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화녀’로 스크린에 새바람
조영남과 미국행…13년만에 이혼
두 아들 홀로 키우며 영화판 복귀
많은 작품 통해 독특한 캐릭터 구축
“감독이 중요한 걸 60 넘어 알았다
민폐가 안될 때까지 열심히 할 것”
“먹고 살려고 연기했다. 이젠 사치스럽게 살기로 했다.”

삶은 척박해서 절실해져야 했다. 이혼 뒤 자신에게 남겨진 두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더욱 그랬다. 무엇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척척하게 물기어린 토양 위에서 끈질기게 자라나는 미나리처럼. 그런 끝에서 세계적 주목을 받는 무대에 나섰고, 황금빛 트로피에 비치는 자신의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55년의 연기 인생이 빚어낸 거침없음은 본래의 것이기도 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년) ·시체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웬만해선 타협 안되는 역할을 원한다”
윤여정은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나서며 허스키한 목소리와 똑 부러지는 강한 개성으로 안방극장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1970년 MBC가 그를 ‘스카우트’하며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신세대 젊은 여성의 톡톡 튀는 이미지”(영화전공자 이호걸)로 카메라 앞에 선 그는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스크린 주역이 됐다. 강렬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여전히 이미지와 실제가 뒤섞인 모습이었다. 26일 아카데미 수상 기자회견에서 “김 감독을 만난 21살 때 남들이 천재라 부르는 그를 난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말한 바이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고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성격배우로서, 특히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1971년 3월11일자 조선일보)을 원한다고 그는 답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년)·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그리고 드라마 ‘장희빈’으로 향했다. 한국드라마 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로 각인된 첫 번째 장희빈이었다. 명망 높은 극단 산울림을 무대로 연극에도 나섰던 그는 1973년 12월 약혼자였던 가수 조영남을 따라 미국으로 향했다. 영화 ‘미나리’ 속 캐릭터들처럼 생면부지의 땅 플로리다 피터즈버그에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시급 2.75달러를 받고 슈퍼마켓에서 일했다”(LA타임스 인터뷰)는 그는 1984년 귀국한 뒤 3년 뒤 이혼했다.

독특한 캐릭터와 다름을 아는 생의 조화

20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40대 여성이 남편의 배신으로 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1990년 연극 ‘위기의 여자’에 나선 뒤 이렇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누구를 사랑할 뿐이지, 결코 간섭하거나 무엇을 요구하지 않겠다. 일생을 걸고 만나서 자식 낳고 살다 헤어지는 건 끔찍한 일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1990년 12월14일자 동아일보)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2012년)·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그만큼 인생에 대한 책임감은 더해갔다. 두 아들을 홀로 키워내며 다시 카메라 앞에서 크고 작은 몸짓의 연기를 펼쳤다. 2000년대 충무로는 그를 다시 호출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을 시작으로 ‘하녀’ ‘돈의 맛’,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과 ‘죽여주는 여자’ 등으로, 젊거나 늙거나 윤여정은 본래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며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고령화가족’ ‘장수상회’ ‘그것만이 내 세상’ 등으로는 모성애로 관객의 가슴을 위로했다. 미국생활로 얻은 영어 소통 능력은 2015년 라나·릴리 워쇼스키 자매 감독의 미국드라마 ‘센스8’과 최근 촬영을 마친 미국 OTT(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의 주연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년)·베를린 국제영화제 초청


영화 ‘미나리’는 그 정점이다. 윤여정은 26일 “영화는 감독이 진짜 중요하다는 걸 나이 60이 넘어 알았다”면서 “김기영 감독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정말 죄송하다. 늙어서 만난 정이삭 감독은 모두를 존중한다. 희망을 봤다. 내가 감사를 모르지 않았나. 김 감독에게 주지 못한 감사를 정 감독에게 한다. 이제야 감사를 안 것 같다. 여전히 철이 안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사람이 좋으면. 사치스럽게 살기로 결심했다. 늙은 나를 건드리는 진심의 이야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겸손과 자신감, 삶의 보람과 회한이 어우러지는 모습으로 여전히 무대에 나설 그는 “대사 외우는 게 힘든데 열심히 한다. 민폐 끼치는 건 싫으니까 민폐 안 될 때까지 이 일을 하다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거침없이 솔직해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도 ‘윤며들다’(윤여정에게 스며들다), ‘휴먼여정체’ 등 신조어를 안기며 “스타 배우는 틀리다. 오래하는 사람이 대단하다”며 배우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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