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새롭고, 스토리는 순했다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2]

입력 2023-01-29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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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뮤지컬의 명가 EMK가 7년간 숙성시킨 뮤지컬 ‘베토벤’
-박은태, 박효신, 카이…3*8=24색의 총천연색 베토벤의 매력
-조정은의 안토니, 스토리에 숨을 불어넣는 ‘매직문’의 마법
요리의 재료가 뛰어날수록 요리사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급 소고기는 숯불에 구워 소금과 후추 정도로만 간을 해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갓 잡아 올린 신선한 생선, 해산물 역시 날로 먹거나 굽는 것이 최선이지요.

뮤지컬 ‘베토벤(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뮤지컬의 명가 EMK가 7년을 공들여 내놨다는 작품.
7년이란 시간 속에는 베토벤의 음악이라는 인류 최대의 ‘재료’를 갖고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이 녹아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미하엘 쿤체(극작)와 실베스터 르베이(작곡) 명콤비는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되, 새롭게’라는 결론을 내린 모양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이라는 위대한 재료로부터 최고의 맛과 식감을 뽑아내기 위해 자극적인 양념을 최대한 자제하고, 조리법도 간소화했습니다.
그 결과 뮤지컬 ‘베토벤’은 ‘음악은 새롭고, 스토리는 순한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소품부터 독주곡(피아노가 압도적으로 많다), 기악곡, 교향곡까지 1, 2막을 합쳐 총 52곡에 달하는 넘버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흥건합니다. 하지만 어지간한 클래식 후각을 지난 마니아라고 해도 이 모든 넘버 안에서 베토벤을 맡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건 베토벤이군”하는 넘버들도 많지만 “베토벤인데, 틀림없이 베토벤인데, 잘 모르겠다”라든지 “이건 정말 베토벤일까”, “흐음 … 듣다보니 역시 베토벤인걸” 싶은 넘버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한 것 같은데, 먹다 보니 어디선가 먹어본 기억이 있는,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소스의 맛이 뒤끝에 남는 식입니다.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오페라를 뮤지컬로 만드는 것인데요.
“그런 것은 이미 많이 있지 않느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저의 상상은 오페라를 스토리만 동일한 뮤지컬로 만드는 것(예를 들어 카르멘이 있었습니다)이 아니라, 오페라의 음악을 (대본은 손을 좀 봐야 하겠지만) 그대로 뮤지컬에 사용하는 겁니다. 뮤지컬 배우들도 성악 발성이 아닌, 뮤지컬 스타일로 아리아를 부릅니다.
그러니까, 푸치니의 뮤지컬 ‘나비부인’ 같은 것.


상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뮤지컬 ‘베토벤’을 보면서 조금은 다행이다 싶어졌습니다.
클래식 작곡가, 그것도 ‘악성’의 음악을 갖고 굽고 찌고 튀겨 뮤지컬 작품을 만들다니요.
저와 같은 상상, 아니 그 이상의 상상을 하고 있던, 그리고 그 상상의 멱살을 잡아 현실로 끌고 오는 사람들이 진짜 있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뮤지컬 ‘베토벤’을 본 날의 캐스팅은 ‘베토벤’ 박은태, ‘안토니’ 조정은의 조합이었습니다.
10년 이상 뮤지컬을 보아 온 팬이라면 ‘피맛골 연가(2010)’의 박은태(김생), 조정은(홍랑)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부르는 명넘버 ‘아침은 오지 않으리’는 한동안 제 전화기의 컬러링이기도 했습니다.

박은태는 이제 슬슬 ‘뛰어난 배우’에서 ‘위대한 배우’로 진입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베토벤의 괴짜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다소 뻣뻣한 베토벤을 만들어 놓았는데요. 13년 전 유리알 같던 미성은 이제 고음에서 살짝 흔적만 느껴지는 정도. 오히려 지금의 박은태는 포탄이 동시에 불꽃을 뿜으며 튀어 나오는 10대의 대포처럼 박력있는 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극에서의 존재감이 커져서일까요. 무대에서의 모습 또한 잔뜩 ‘벌크업’ 되어 보입니다.


조정은은 음색, 성량, 곡의 해석, 캐릭터로서의 외모, 연기.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작품에서만큼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조차 없는 배우입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작품에 관한 한 ‘소식좌’ 수준이라는 것. 작품을 고르는 눈이 상당히 까다로운 편인데, 그 기준이 적어도 ‘잘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합니다. 은근히 배역에 대한 도전적인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순한 맛’을 위해 늘어뜨려 놓은 듯한 스토리에 개연성의 호흡을 불어넣는 역할은 안토니입니다. 베토벤이 왜 안토니를 느닷없이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왜 그렇게 순식간에 나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 이 작품은 일일이 또는 순순히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조정은의 안토니는 단 두 곡의 ‘넘버’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이런 마법은 안토니였기에 가능했을까요. 아니면 조정은이어서였을까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이 흐르는 안토니의 ‘매직문’은 정말 황홀한 넘버입니다.


‘베토벤’은 박은태 외에도 박효신과 카이가 맡고 있습니다. 각자 8가지 색깔을 가진 ‘팔색조 배우’들이니 이 작품의 ‘베토벤’은 24색(3*8)의 총천연색이 되겠군요. 보고 돌아서자마자, 재연이 기다려집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편 공연보기’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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