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일제강점기의 조선, 유쾌한 귀신 이야기로 풀어
친근감 드는 무대 위 배우들 연기에 나도 모르게 응원
“소극장 작품에서 이런 퀄리티?” 홀로그램 영상에 감탄
‘귀신과 한 집에서 산다’는 아이디어는 “앗, 정말?”할 정도로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뮤지컬로까지 끊임없이 변주되는 데에는 “그래도 재밌어”하는 대중의 선호 덕이겠지요.친근감 드는 무대 위 배우들 연기에 나도 모르게 응원
“소극장 작품에서 이런 퀄리티?” 홀로그램 영상에 감탄
뮤지컬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역시 ‘귀신들과의 동거’ 이야기입니다. 이 다소 긴 제목은 질문이랄 것도 없습니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답이 톡 떨어지니까요. 그렇습니다. 귀신, 귀신들입니다.
2021년 연말에 공연되었던 ‘쿠로이 저택’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숨도 안 쉬고 덥석 티켓을 쥐었습니다. ‘누가 살고 있는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궁금했으니까요.
대학로를 들었다 놨다 했다는 이 작품의 재미에 숟가락 하나 들이밀었습니다.
‘쿠로이 저택’을 보고 난 제 짧은 감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싼티없이, 과하지 않게, 느끼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웃음을 주는 작품.
무엇보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 이렇게나 친근하게 느껴지는 뮤지컬은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쿠로이 저택’은 대놓고 웃겨보자는 작품은 아닙니다. “여기, 감동 갖고 가세요” 해놓고 관객의 눈치를 살피는 작품도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그리고 오래 전에 불에 타 폐가처럼 되어 버린(그래야 귀신이 살지요) 쿠로이 저택. 돈 많은 일본인 귀족의 투자를 받은 여성 사업가 가네코는 이 저택을 개조해 호텔을 지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죽은 형(해영)의 유물인 주머니 시계에 이끌려 쿠로이 저택에 해웅(시계 수리공입니다)이 들어서게 되고, 귀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려 온 지박령 옥희(집 주인이죠)와 네 명의 귀신들은 “드디어 성불할 기회가 왔다”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렇게 ‘쿠로이 저택’은 성불하고 싶어 하는 귀신들과 저택을 허물고 일본인들을 위한 호텔을 지으려는 사람들,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작전과 이들을 추적하는 일본경찰이 얽히며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어 갑니다.
흉가처럼 변해 버린 쿠로이 저택은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인 조선의 암울한 형국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옥희는 자신의 방을 온통 까만색으로 해달라고 요구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옥희는 현재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속도 겉도 다 타버린 당시의 조선과 조선인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쿠로이 저택 역시 단순히 ‘불탄 집’이라는 의미에서 ‘쿠로이(까맣다의 일본어 형용사) 저택’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당시 조선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겠네요.
옥희와 함께 살고 있는 네 명의 귀신 역시 전형적인 ‘조선의 귀신’들입니다. 양반이었던 할아버지 선관귀신, 장군귀신, 처녀귀신, 아기귀신. 점을 보러 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들 중 한 명쯤은 들어보셨을 것도 같군요.
옥희와 네 귀신들의 목적은 성불하는 것입니다. 성불은 원래 불교의 용어로 깨달아 번뇌로부터 벗어나 부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귀신이 이 땅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귀신들이 한을 풀고 한 명씩 차례로 ‘성불’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멋진 해피엔딩이죠.
이 뮤지컬에서 적극 활용되는 홀로그램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소극장에서 이 정도 퀄리티의 홀로그램 영상무대를 볼 수 있다니. 놀라움을 넘어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오프닝 장면에서 귀신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홀로그램에서는 감탄이 절로.
앞서 말했듯 배우들이 친근하기 그지없습니다. 배역 하나 하나가 친구, 지인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응원하게 됩니다.
옥희 역은 송나영, 홍나현, 신가은 배우가 맡고 있는데 제가 본 날은 홍나현 ‘옥희’. 2019년 연극 ‘왕복서간: 십오년 뒤의 보충수업’에서 본 이후 처음이로군요. ‘비틀쥬스(2021)’의 리디아를 보지 못했으니 뮤지컬 배우로서 ‘노래하는 홍나현’은 첫 대면인데, 과연 한국 뮤지컬계가 찜한 ‘물건’다운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노래도 좋았지만 얼음을 깨듯 명징한 대사, 강약과 템포, 중국 변검 장인 같은 표정의 변화까지. 극을 골대 앞까지 치고 들어가 그물망을 흔들어놓는 손흥민 선수 같은 쾌감을 안겨줍니다.
아홉 살 옥희로 급변하는 장면에서는 ‘하아 …’하고 숨이 나와 버렸습니다.
이 밖에도.
매력적인 음색, 홍나현 옥희와 호흡이 잘 맞았던 이주순 ‘해웅’.
“엇, 원래 시인이신가?” 싶었는데, 최근 EMK엔터테인먼트에서 냉큼 스카우트했다는 뜨는 별, 박시인 ‘가네코’.
풍금 장면 하나로 이 작품의 온기를 ‘확’ 올려준 유성재 ‘아저씨’.
‘100인 씬’에서 체력 다 써버린 신창주 ‘요시다’.
모두 감사했습니다.
PS1. 장군귀신을 보며 ‘어, 우찬씨? 캐스팅보드에서 못 봤는데…’ 싶었더니 이미 3년 전부터 본명인 ‘이경욱’으로 돌아왔더군요. 집요하게 해웅을 추적하는 일본경찰 노다 역도 병행합니다.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동료배우, 스태프들에게 인기만점인 훈훈한 인품의 배우라지요.
PS2. 극 초반, 해웅의 형 해영은 친구에게 옥희를 맡기고 떠납니다. 해영과 옥희의 관계가 궁금해 수소문해 보았는데요. 결론은 ‘해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