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이자 50회 토론토 ‘국제관객상’ 수상작, 그리고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가 마침내 관객의 품에 안긴다. 사진 | CJ ENM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이자 50회 토론토 ‘국제관객상’ 수상작, 그리고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가 마침내 관객의 품에 안긴다. 사진 | CJ ENM



‘박찬욱의 웃음은 절묘하고 시의적절하다.’

박찬욱이 예술성보다 상업성, 수상보다 흥행에 방점을 찍은 영화를 만들었다 했을 때, 누구나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부조리하고 일그러진 것들을 수려하게 말하는데 탁월한 그가 웃겨봐야 얼마나 웃길까 싶고, 현존하는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히는 그가 왜 느닷없이 관객을 웃기는 데 앞장서는지가 미심쩍기 때문이다.

영화를 끝까지 본 다음 그 두 가지에서만큼은 명쾌해졌다. 첫째, 박찬욱은 웃길 줄 안다. 둘째, 그 웃음은 시의적절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 속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관객들을 극장에 단 한명이라도 더 앉혀야 하는 사명을 떠안고 있다. 박찬욱은 온실에서 분재를 매만지는 만수(이병헌)처럼 자기 취향만을 밀고 나간다 해도 누구도 뭐라 못할 ‘거장’이지만, 밖에 나가 구덩이를 파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뱀에게 물리고, 살인까지 결행하면서까지 그가 속한 세계를 지켜내야 하는 한국 영화의 ‘가장’이기도 하다.

박찬욱은 웃음으로 한국 영화가 처한 위기를 ‘모면’ 아닌 ‘돌파’해 나간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박찬욱이란 ‘프리미엄 라벨’이 붙은 영화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그가 정교하게 설계한 심오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쩔수가없다’는 덜 ‘어려운’ 영화다. 어떤 메타포를 놓쳤나 싶어 플롯과 행간을 헤매는 사이, 이야기가 가쁜 호흡으로 돌격하고 곳곳에 포진한 그야말로 웃음 수류탄이 관객 사이를 빠르게 스쳐 간다.

‘어쩔수가없다’는 은유가 아닌 직유다. 이건 박찬욱이 직접 옮긴 말이다. 그는 “‘헤어질 결심’이 시적이라면 ‘어쩔수가없다’는 산문, 전작이 여백이 많았다면 이번 영화는 꽉 차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자, 지금까지 박찬욱의 작품 중 가장 ‘웃긴 이야기’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사진 | CJ ENM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자, 지금까지 박찬욱의 작품 중 가장 ‘웃긴 이야기’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사진 | CJ ENM


내가 하는 건 아주 힘든, 그런 면접이라고.

주인공 만수는 근래 박찬욱 영화 중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물이다. 자신이 수사 중인 사건의 범인과 사랑에 빠지지도 않고(‘헤어질 결심’), 이모부와 사기꾼이 서로 결혼하자 달려드는 상속녀(‘아가씨’)도 아니다. 단지 해고를 통보받았을 뿐인데, 이에 대처하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이만하면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믿었던 한 가장이 다니던 제지 회사에서 돌연 해고된 이후, 자신과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가 말한 ‘힘든 면접’, 재취업 과정은 바로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수세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는 만수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이는 해고하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번번이 나오는 말이다.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만수는 자기 의지가 상실된 상태라 굳게 믿지만, 실제로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다. 극 중 범모(이성민)처럼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도, 시조(차승원)처럼 제지 회사가 아닌 다른 일에 도전할 수도 있다. 중산층인 만수는 하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당장 굶어 죽지는 않는다. 차를 팔고 아파트 전세로 이사하고, 그저 양손 가득 쥐고 있던 것을 좀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만수는 한쪽도 놓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 박찬욱이 자주 다뤄온 주제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축인 ‘딜레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박 감독은 ‘어느 쪽이 (자신을 위해) 더 올바른 선택이냐?’란 질문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자장면, 짬뽕이 아닌 도덕적·윤리적 딜레마”라며 “어느 쪽도 좋기는커녕 뭐가 더 나쁜지 모를 때 정말 고민이 되는 상황”이라 덧붙였다. 경쟁자를 죽이지 않으면 가장으로서 존재가 부정당하고, 죽이면 남을 나쁘게 하는 건 당연하고 내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은 작품에서 캐릭터의 관계성의 중요도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라는 존재 없이는 동기라던가 행동의 이유들이 잘 설명되지 않을 만큼 의지를 많이 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다. 또 범모, 시조, 선출 등 타겟이 되는 남자들은 만수와 뭔가를 다 공통 분모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진제공 | CJ ENM

박찬욱 감독은 작품에서 캐릭터의 관계성의 중요도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라는 존재 없이는 동기라던가 행동의 이유들이 잘 설명되지 않을 만큼 의지를 많이 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다. 또 범모, 시조, 선출 등 타겟이 되는 남자들은 만수와 뭔가를 다 공통 분모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진제공 | CJ ENM


후자를 택한 만수는 이 다음에도 또 다른 딜레마에 거듭 직면한다. 만수가 없애기로 결심한 인물들은 그와 어느 하나는 꼭 닮은 구석이 있는 연민과 유대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그의 범행은 자신의 분신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일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악의 평범성’이나 ‘낙원의 테두리가 좁아져 갈 때 인간의 행동양식은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종류의 편평한 메시지만 전달하지 않는다. 관객을 끌어와 찰방찰방한 딜레마의 늪에 빠뜨린다. 공감이든 비난이든, 이해든 손가락질이든 뭐든 하라고 부추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 하에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영화)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 20명이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만수도 그 20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자신만의 이유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되어야 할 것이 된다. 만수로 들어가는 여정은 끔찍하면서도 애틋하고, 웃긴데 슬프다. 짧은 시간에 이같이 깊숙한 감정을 들쑤셔내는 건 온전히 배우의 몫이다. 관객을 캐릭터 강한 인물들에 즉각 투사시키는 건 배우들의 박력 있고 흡인력 있는 연기 덕분이다.

‘어쩔수가없다’는 개봉 전부터 최고의 화제성을 자랑한다. 전 세계 200여 개국에 선판매되며 순제작비 이상의 판매 성과를 달성, 개봉 전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CJ ENM이 배급한 역대 한국 영화 최고 해외 판매 성적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 CJ ENM

‘어쩔수가없다’는 개봉 전부터 최고의 화제성을 자랑한다. 전 세계 200여 개국에 선판매되며 순제작비 이상의 판매 성과를 달성, 개봉 전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CJ ENM이 배급한 역대 한국 영화 최고 해외 판매 성적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 CJ ENM


웃음과 비웃음, 유미주의자의 인간극장

박찬욱이 ‘꽉’ 차 있다 표현했듯 영화는 딜레마를 큰 축으로, 감각적 쾌락에 기여하는 기술, 행동과 의미의 기호, 웃음과 비웃음, 조소와 자조 같은 온갖 것들로 뒤엉켜 있다. 그중에서도 박찬욱이 ‘회심의 유머’라 언급한 고추잠자리 신에서는 그의 말처럼 “특이하고도 슬픈, 불쌍한” 인간들의 ‘하이퍼 액션’ 장면이 펼쳐진다. 인물들의 곪을 대로 곪은 고름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기록한 장면은 기술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시퀀스다. 

박찬욱은 아무리 비틀리고 코믹한 이야기라도 아름답기를 주저하지 않는 연출가다. 만수가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려 총을 빼 든 것처럼, 박찬욱 역시 아름다움에서만큼은 한치의 물러남이 없다. 일례로 만수가 아라(염혜란)에게서 달아나는 장면에서는 진절머리 나는 인물들의 분투에 몸서리가 쳐지다 이윽고 와이드 샷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고 만다. 급격한 감정의 낙차를 경험한다. 이렇듯 박찬욱 고유의 미술과 기술이 독한 유머 사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는 영화의 건축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박찬욱 표 인간극장의 주된 무대는 바로 만수의 집이다. 앞서 박 감독은 집을 만수와 동일시해도 지나치지 않는 ‘하나의 캐릭터’ 같은 미장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탁월한 미쟝센과 음악 역시 영화 ‘어쩔수가없다’ 를 한층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게 돕는 요소다. 불란서 주택이라고도 불리는 만수의 집과 한국가요, 오케스트라 음악은 영화 속 또 다른 ‘캐릭터’라 할 정도로 높은 비중으로 다뤄진다. 사진제공 | CJ ENM

탁월한 미쟝센과 음악 역시 영화 ‘어쩔수가없다’ 를 한층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게 돕는 요소다. 불란서 주택이라고도 불리는 만수의 집과 한국가요, 오케스트라 음악은 영화 속 또 다른 ‘캐릭터’라 할 정도로 높은 비중으로 다뤄진다. 사진제공 | CJ ENM


만수의 집은 1970년대 한국 건축업계에서 유행했던 서양식 주택 이른바 ‘불란서 주택’을 영화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과거 중산층에서 선호하던 스타일이자 말하자면 ‘엉터리 유럽식 주택’인데, 박 감독은 그 옛날 한국에만 있던 불란서 집의 절충적 양식과 일종의 동경 어린 마음이 독특하고 매혹적이라고 말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불란서 주택에 노출 콘크리트로 브루탈리즘(거친 질감의 건축 양식)을 덧대, 만수의 다층적 내면을 시각적으로 축조했다.

영화의 또 다른 캐릭터라 할 만 음악 역시 비중이 높다. 박 감독은 1970~80년대 한국의 유행가를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조용필 노래를 택했다. 조용필 노래 중에 뭘 쓰는지가 고민이었는데, 이것저것 맞춰보다 고른 곡이 ‘고추잠자리’였다. 그는 “어떤 순간에는 장면과 가사가 교묘하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하고, 영상 프레임을 조금씩 밀고 당기면서 절묘한 조합을 찾아냈다”고 했다.

이와 대조적인 현악기와 오케스트라 음향도 영화의 감상을 한층 풍부하게 한다. 박 감독은 원시적이고 현대적인 음향을 위해 “제작비를 쥐어 짜내고 출연료도 막 깎으면서” 런던 컨템포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데 성공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쟝 기엔 케라스와 협업하기로 한 그의 판단도 적중했다. 작품엔 첼로 음악이 영화의 톤을 한층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장치를 넘어 중대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첼로 음악의 정체는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24일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은지 기자 eun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