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기자와러브레터]‘잔인한4월’견디는‘우아한4월’

입력 2008-04-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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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황인숙읽기…계절의역설묘한여운
‘4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 시의 1부 ‘죽은 자의 매장’ 첫 구절입니다. 모든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4월이 도리어 역설적으로 서글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녹색의 계절에 도리어 그 녹색이 못내 시린 사람들, 바로 영화배우 장국영의 팬들일 겁니다. 적어도 장국영의 팬들은 이달만 되면 더더욱 장국영의 죽음이 떠오를 테니 4월은 잔인합니다. 바로 5년 전 장국영은 호텔에서 스스로 추락해 목숨을 끊습니다. 자신이 죽은 날이 만우절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양, 홀로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미스테리 소문도 무성했습니다. 죽기 전 러닝머신을 달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올해는 ‘2008년 4월 1일, 영원히 잊지 못할 1분의 추억’이라는 부제로 ‘아비정전’이 극장에서 다시 개봉됐습니다.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은 1960년 4월 16일에서 1961년 4월 16일까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한 곳에 발을 딛지 못하고 떠도는 황폐하고 쓸쓸한 영혼들을 고스란히 영상에 드러낸 수작입니다.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다가가 호감을 드러낸 1분의 순간부터, 기차간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 그를 추억하는 순간까지 역시 모두 4월입니다. 유가령· 장만옥의 얇은 원피스, 필리핀의 야자수, 코카콜라의 유리병, 심지어 남자의 비누통까지 이 영화는 온통 초록색입니다. 남녀의 주변을 온통 빛나는 푸른색으로 그렸지만 외로움은 더 극대화됐습니다. 장만옥은 축구 관객들의 응원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릴 때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졸기만 합니다. 그 순간 다가온 장국영은 모조리 그의 마음을 훔쳐가지만, 사랑 뒤에 더 쓸쓸해지는 역설을 장만옥의 낯빛이 보여줍니다. 장만옥의 표정을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글이 있으니 바로 ‘황인숙’의 수필과 시입니다. 잔인한 4월에 재개봉한 아비정전은 결국 황인숙의 글을 추천하려 한 ‘비기자와 러브레터’의 길고 긴 서막입니다. 황인숙이라는 시인을 떠올리면 아비정전의 ‘장만옥’이 불쑥 겹칩니다. 장국영이 떠난 자리에서 조용히 비를 맞던 장만옥, 그 쓸쓸한 자리의 흔적이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등의 시를 발표한 시인과 겹칩니다. 저는 황인숙 시인의 작품을 97년 ‘나는 고독하다’(문학동네)라는 산문집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왕가위 영화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언급에 끌려 10년 넘게 꾸준히 그의 작품을 보고 있습니다. 황인숙의 시와 장만옥, 시인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겹치는 묘한 경험도 하게 됩니다. 게다가 시인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제 자식이라도 뺏긴 양 앙칼지고 오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고양이는 결국 지독한 생명력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면 ‘밝은 들판을 내딛는 꿈을’ 꾸고 달빛을 받는 은은한 잠자리에서 잠이 들겠다고 말합니다. 쓸쓸하지만 고고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법을 황인숙의 시들이 보여줍니다. ‘추락하는 꿈으로도’ 그리고 따분하고 처량한 꿈으로 얼마든지 삶이 ‘푸드덕’ 거릴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황인숙의 시는 외로움과 생동감이 뒤섞여 ‘잔인한 4월’에 읽기에 그만입니다. 푸른빛이 황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한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겨줄 것입니다. 최근 산문집인 ‘일일일락’(마음산책)은 그가 느낀 일상의 사소한 얘기들을 모은 칼럼집입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에 도전하는 얘기며 도를 찾는 사람들이 접근한 이야기 등 소재도 풍부합니다. 조금 흥겨운 리듬에 빠지고 싶으신 분들은 최근 산문을 읽으시고, 고독이 극에 달한 분들은 옛 시집과 옛 산문집을 읽는 게 좋습니다. 외로움을 우아하게 견뎌내는 방법이 황인숙의 책에 들어있습니다.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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