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간을 7분이나 넘겼다. 오케스트라는 침묵의 대기. 관객석에서는 헛기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은발의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정명훈이 나란히 걸어 무대로 들어왔다.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그녀가 피아노 의자를 당겨 앉으니 숨 막히는 긴장감이 홀 전체를 완벽히 지배했다.
기다림이 황홀한 기대감으로 ‘변절’하는 순간이었다.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분위기(?)를 잡더니 드디어 아르헤리치의 손끝에서 프로코피에프의 수수께끼 같은 음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은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3대 피아노협주곡’의 범주에 들어가는 곡이다. 멜로디도 나무랄 데 없지만, 무엇보다 시원시원한 ‘건반 두들기기’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
마치 ‘몰랐니? 피아노는 타악기야’라는 프로코피에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건반의 여제’는 전성기에 비해 조금도 쇠하지 않은 초절기교를 보여주었다. 아르헤리치는 레퍼토리가 꽤 넓은 피아니스트에 속하지만 쇼팽(아르헤리치는 1965년 바르샤바 쇼팽콩쿠르 우승자다)과 라벨, 그리고 프로코피에프의 곡에 특별히 정평이 나 있다.
1994년 내한공연 때 피아노 줄을 끊어버리는 ‘괴력’으로 관객들에게 황홀경을 선사했던 아르헤리치는 이날 원숙한 절제미를 가미해 새로운 아르헤리치풍을 들려주었다. 시상이 감도는 영롱한 맑은 음을 내면서도 어딘지 세월이 녹아 흐르는 듯한 탁음도 들려주었다. 그녀의 탁음을 들으며 ‘마치 담배연기가 스며든 듯 하군’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애연가였다!
2악장의 긴∼ 마침표를 찍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지휘자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1, 2악장에 걸친 고뇌는 3악장에 이르러 마침내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피아니스트의 고뇌에 끼어들지 않고 내내 바라만 보던 서울시향도 힘껏 따라붙는다. 여제의 야성에 불이 ‘확’ 붙었다.
손가락과 상아건반이 서로 ‘경도’를 시험하듯 충돌했다. 쇠 힘줄 같던 파괴력은 세월의 풍화로 여기저기 깎여 나갔지만 대신 깊은 곳에서 한 음 한 음이 울리는 경이가 더해졌다. 마치 3D 화면을 보는 듯 입체감이 풍부했다. 연주 중간 중간 왼손으로 긴 머리를 스윽 흘려 넘기며 오케스트라를 향해 눈을 돌리는 모습은 또 얼마나 근사했던지.
67세의 노장이 과연 이처럼 아름다울 수(섹시하기조차!) 있는 것인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관객은 ‘이보다 더 할 수 없다’는 식의 환호와 열정적인 박수를 쏟아 보냈다. 아르헤리치는 무릎까지 깊이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커튼콜은 무려 7차례나 계속됐다.
놀라운 것은 이날 아르헤리치가 세 번이나 앵콜곡으로 화답해 주었다는 점이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와 쇼팽의 마주르카. 마지막 앵콜곡을 위해 그녀가 피아노로 다가가자 관객들은 감격에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최후의 곡은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한 곡이었다. 따뜻한 정감이 가득한 곡. 프로코피에프에서 들려주었던 송곳 음은 사라지고 양털처럼 따스하고 정감어린 소리만이 남았다.
마치 하루 일과를 마친 여왕이 손주를 무릎에 눕혀놓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느낌이 이러할까.
피아노의 여제는 어느새 67세의 푸근한 ‘할머니’로 돌아와 있었다.
아르헤리치는 이날 프로코피에프가 아닌 ‘인간 아르헤리치’를 연주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여자 피아니스트로 194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1955년 유럽으로 건너가 F.굴다, B.미켈란젤리 등 거장들을 사사했고 1957년 부조니국제콩쿠르와 제네바국제콩쿠르, 1965년에는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일약 세계 피아노계의 ‘퀸’으로 부상했다. 피아노 줄을 끊어버릴 정도의 파워풀한 연주, 지나친 완벽주의, 괴팍한 성품, 갑작스런 연주 일정 취소 등으로 유명하다. 80년대 초반부터는‘너무 외롭고 공허하다’는 이유로 독주무대보다는 실내악과 협연에 치중하고 있다.
‘프로코피에프 3번’ 추천명반□ 1 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7년|DG|스테레오마니아들이 꼽는 최고의 연주. 피아노 줄을 끊어먹는 ‘철녀’ 아르헤리치의 전성시대를 엿볼 수 있는 불멸의 명반이다. 아르헤리치의 격정과 아바도의 냉정한 지휘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매력을 덧칠해 나간다. 강건하면서도 날렵하기 이를 데 없는 아르헤리치의 타건(건반을 때리는 것)이 일품. 훗날인 1997년 아르헤리치가 샤를르 뒤트와의 몬트리올 심포니와 녹음한 판도 있으나 아바도 판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도 매우.
□ 2 윌리엄 카펠(피아노)|안탈 도라티(지휘)|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1949|RCA, NAXOS|모노하차투리안의 피아노협주곡으로 이름을 날렸던 윌리엄 카펠의 명반. 평소의 시적인 투명함을 벗어던진 카펠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쇠같은 타건, 노도와 같은 박력이 백미이다.
카펠의 극적인 연주에 ‘필’을 받았을까? 안탈 도라티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격렬한 지휘로 카펠의 열연을 서포트하고 있다. 녹음된 시기를 감안하면 음질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