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언니하늘나라에선꼭행복해

입력 2008-07-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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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린 시절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저희는 서울이 아주 좋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언니가 꼬박꼬박 10만 원이라는 큰돈을 매 달 부쳐줬기 때문에 마치 언니가 요술 방망이를 든 도깨비 같았습니다. 언니가 마냥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10만원이 무척 큰돈이었기 때문에 행여나 어찌 될까봐, 엄마는 쉬쉬하시며 누런 종이로 싸서 장판 밑에다 숨겨두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던 언니는 일년에 딱 두 번, 설과 추석 때만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애인과 함께 저희 시골마을에 내려왔습니다. 글쎄 배가 불룩하게 불러서 온 겁니다. 임신을 했다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부모님과 저희들 모두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얼굴이 벌개진 아버지께서 동네 부끄럽다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언니 옆에 달달 떨며 서있던 그 애인은 아버지가 던지시는 목침에 등짝을 세게 얻어맞고, 밖으로 쫓겨나갔습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니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셨습니다. 이후 언니부부는 저희 집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형부는 혈혈단신 홀몸이었고, 일이라고 해봤자 큐큐, 나나, 인찌 등 이런 일본말이 섞인 가봉공장 일이 전부였습니다. 형부는 당장 아버지 말씀대로 쟁기질과 곡괭이질을 하며 농군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도 오래하지 못 하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가 다시 한번 아버지의 목침 세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뭐든 네 마음대로냐? 남의 집 딸내미 훔쳐내는 것도 네 마음대로고, 서울 가는 것도 네 마음대로면, 도대체 여긴 뭐하러 온 거냐? 당장 나가버려!” 하고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언니네 부부는 또 서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 언니 소식을 들었는데, 냄새나는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봉지쌀과 연탄 낱장으로 겨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역전이란 말이 정말 가능한 건지, 형부가 모래를 팔기 시작하면서 건설업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벼락부자가 됐던 겁니다. 십 만원을 부쳐주던 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몇 백만 원씩 저희 가족들을 위해 언니는 큰 돈을 보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형부를 인정하게 되셨습니다. 저희도 더불어서 넉넉한 용돈으로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서울 부잣집에서 사는 언니가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저와 동생들은 방학이면 서울 구경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언니의 윤택한 삶도 별안간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언니의 딸 경숙이가 발을 헛디뎌서 베란다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경숙이는 언니를 뒤로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고, 언니는 거의 미칠 것 같이 몇날 며칠을 울면서 살았습니다.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형부의 사업도 내리막길을 걸었고, 형부의 여성편력도 줄줄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렇게 언니의 삶은 또 다시 한순간에 기구한 삶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불과 5∼6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언니는 형부와 별거를 하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몇 년 전 다시 재결합을 했는데, 이번엔 언니의 건강이 문제였습니다. 형부와 다시 관계를 회복해서 이제야 모든 게 안정돼 간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언니의 간과 폐와 위에 모두 암세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5월 언니는 쉰둘이라는 젊은 나이로, 황급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처럼 우리 언니, 애간장이 녹을 만큼 그렇게 고생을 했나봅니다. 언니가 암으로 떠난 후, 저는 생로병사 네 가지 중 과연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언니의 죽음을 보며 한낱 무기력한 인간임을 한탄하게 됐고, 좀더 마음을 비우고 넓게 세상을 살겠다고 반성하게 됐습니다. 우리 언니, 고생만 하다 떠난 착한 사람입니다. 아까운 사람, 언니를 위한 명복을 빌어봅니다. 부산 동래 | 박경미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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