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피플] 설도윤 “나는 승부사…200억 무대 과감히 베팅”

입력 2012-06-14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내 목표는 우리 창작 작품을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는 것.” ‘위키드’의 대성공으로 ‘국내 뮤지컬 최고의 흥행 승부사’란 평가를 다시 한번 입증한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line007

■ 설앤컴퍼니 대표 설도윤

공연제작의 미다스손…‘위키드’ 흥행 1위
제작자로서 시장 흐름 꿰뚫는 안목 중요

마이너들, 유행을 관객성향으로 몰아 착잡
우리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가는 게 목표

서울 한남동의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무대 위의 배우들이 함께 “위키드”를 연호하면서 뮤지컬 ‘위키드’의 막이 서서히 내려갔다. 관객들의 함성과 박수가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1층에 이어 2·3층까지 전 관객이 기립했다. 환호와 박수 소리로 공기가 터져나갈 듯 뜨거운 공연장 구석에 한 남자가 눈시울을 붉힌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설도윤(53). ‘한국뮤지컬의 흥행사’로 불리는 공연제작사 설앤컴퍼니의 대표다.


- ‘위키드’가 티켓 판매 1위를 지키고 있다. 기분이 좋아 잠이 안 오겠다.

“하하! 첫 공연 때 공연장에서 감정이 북받쳐 뭉클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작품은 나로서도 흔치않은 일이다.”


- ‘위키드’는 국내 뮤지컬 제작자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던 작품이지만 워낙 제작비가 높아 엄두를 못냈는데….

“누구나 가져오고 싶어하면서 정작 가져오지 못한 건 시장에 대한 예측을 못해서다. ‘위키드’는 200억짜리 대작이다. 매출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분석이 없으면 못한다. 확신을 갖고 덤비는 사람과 ‘하고 싶기는 한데, 과연 될까’라고 머뭇거리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 프로듀서로서 작품을 고르는 특별한 안목이 있을 것 같다.

“해외시장, 특히 브로드웨이의 흐름에 주목한다. 브로드웨이는 10년 정도의 주기가 있다. 1994년 디즈니가 뛰어들면서 가족이 볼 수 있는 작품이 늘어났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지자, 사람들은 심각하고 무거운 영국 작품 대신 가벼운 작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는 ‘멤피스’처럼 인종을 소재로 한 작품도 주목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읽는 것이 내게 굉장히 중요하다.”


- 2001년 제작한 ‘오페라의 유령’ 라이선스 공연은 우리 뮤지컬사에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규모가 800억 정도였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제작비만 100억짜리였다(‘오페라의 유령’은 한국에서 19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편집자주).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 산업화에 눈을 뜬 계기가 됐다. 지금 국내 뮤지컬 시장은 2500억원에 가깝게 성장했다. 3000억 정도가 되면 완전한 산업화라 할 수 있다.”


- 한국 뮤지컬 시장은 3000억원 규모가 적절한가.

“물론이다. 현재 뮤지컬은 산업화 초기 단계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우리 경제와 인구를 볼 때 3000억원이 적절하다고 본다. 3000억 시대가 되면 포화 상태의 국내를 벗어나 해외로 나가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아직 브로드웨이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프로듀서가 없고, 제대로 진출한 작품 한 편도 없다.”


- 브로드웨이 진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지 않으면 ‘세계적인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 일부 마이너 작품들이 아이돌 등을 기용하고 최고의 작품처럼 포장해 관객의 눈을 흐리는 사례를 보면 안타깝다. (이런 작품들이) 관객 성향을 유행으로 몰아가버리면 곤란하다. 대중음악계가 어려워진 것은 음악적 다양성을 잃으면서다. 뮤지컬도 그런 현상이 벌어질까봐 우려된다.”

제작비 200억원의 블록버스터 뮤지컬 ‘위키드’. ‘오즈의 마법사’를 위트있게 비튼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9년째 공연중이다(위). ‘위키드’의 주인공으로 훗날 나쁜 초록마녀와 착한 마녀가 되는 ‘엘파바’(왼쪽)와 ‘글린다’(아래). 사진제공|설앤컴퍼니



● “나는 승부사…뮤지컬 프로듀서 아니었으면 갬블러 됐을 것”


- 설 대표는 성악가, 배우, 안무가에 이어 프로듀서로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태권도장을 다니며 쌈박질만 하던 놈이 뜬금없이 슈베르트 가곡에 반해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고 추송웅 선생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고 연극에 미쳤다. 뮤지컬 배우가 됐지만 춤을 따라가지 못해 현대무용의 대모이신 육완순 선생님께 따로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안무가가 되었고, 공연을 위해 기획을 하고 감독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프로듀서가 됐다.”


- 사실 공연계에서 설대표는 만나기 힘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며칠 전 상갓집에서 누가 나보고 ‘공연계 외계인’이라고 하더라. 도대체 나타나지 않는다고. 일이 바쁘고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직원들도 보기 어렵다. 사무실도 오랜 만에 나왔더니 어색하다. 이 인터뷰가 끝나면 곧바로 1박3일로 미국에 출장을 가야 한다.”


- 프로듀서로서 화려한 성공의 길만 걸어온 것 같다.

“오히려 처절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2년 집까지 팔아서 제작한 ‘재즈’가 참패해 빚더미에 앉았다. IMF 직격탄을 맞아 통장에 잔고 500원만 남은 상태에서 6개월을 버티기도 했다. 태풍에 야외무대가 무너져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도 있다. 그 시절 전폭적으로 믿고 도와준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 했을 것이다.”


- 뮤지컬의 흥행은 결국 프로듀서의 책임이다. 참 외로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보다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보기보다 승부기질이 강한 사람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작품이 흥행할 때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낀다. 아마 뮤지컬 프로듀서 안 했으면 갬블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하!”


- 앞으로 뮤지컬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창작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것, 그리고 예술학교를 설립해 뮤지컬 인재를 키우는 것이다.”

■ 설도윤 대표 프로필

1959년 경북 포항 출생.
1991년 SBS 예술단장.
1995년 ‘사랑은 비를 타고’로 뮤지컬 프로듀서 입문.
2001년 ‘오페라의 유령’ 한국 초연 프로듀서.
2002년 동아일보 ‘올해의 10대 문화인물’.
2003년 뮤지컬 ‘라보엠’으로 한국인 첫 브로드웨이 프로듀서.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