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원상은 사진을 찍으며 “‘남영동 1985, 보러오세요’라는 콘셉트를 잡았어요. 그런 눈빛으로 잘 보이나요?”라며 위트있게 말했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남영동 1985’를 보고 난 감정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기가 막막하다. 그야말로 ‘돌직구’처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파내어 아프고 힘들다.
보는 이는 105분간 아파하지만 촬영하며 두 달을 아파했던 한 사람이 여기 있다.
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겪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해 ‘김종태’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배우 박원상(42)이다.
보는 이는 105분간 아파하지만 촬영하며 두 달을 아파했던 한 사람이 여기 있다.
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겪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해 ‘김종태’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배우 박원상(42)이다.
‘영화 속 김종태와 배우 박원상은 얼마나 닮았을까’ ‘다르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는 만나기 전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터뷰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박원상은 먼저 카페에 도착해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창 영화 홍보를 하고 있는 터라 피곤했을 법도 한데 “몸이 튼튼해서 괜찮다”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부러진 화살’로 처음 정지영 감독과 만난 박원상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정 감독과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만큼 정지영 감독은 자신에게 커다란 존재였기에 ‘남영동 1985’에서 정 감독이 다시 내민 손을 감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인터뷰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박원상은 먼저 카페에 도착해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창 영화 홍보를 하고 있는 터라 피곤했을 법도 한데 “몸이 튼튼해서 괜찮다”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부러진 화살’로 처음 정지영 감독과 만난 박원상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정 감독과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만큼 정지영 감독은 자신에게 커다란 존재였기에 ‘남영동 1985’에서 정 감독이 다시 내민 손을 감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막막하진 않았나.
“‘부러진 화살’을 홍보할 때 라디오 방송에 감독님과 출연한 적이 있다. 그 때 감독님께서 ‘다음 작품은 ‘김근태 의원과 이근안의 이야기’로 갈 예정인데 ‘부러진 화살’팀과 다시 하고 싶다’라고 하셨다. 감독님께서 연이어 나를 써주신다는 게 굉장히 큰 의미였고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 ‘남영동’ 수기를 읽고 초고를 봤는데 그제야 ‘아!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영화만 보면 ‘고문’ 때문에 막막했을 거란 생각을 하던데 난 아니었다. 88학번인 내가 대학교를 다녔을 때 학생 운동이 참 많았다. 과친구들이 경찰서에 붙잡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연극 활동에 전념했다. 그런데 한평생 굳은 심지로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김근태 의원을 연기한다는 게 어려움이었다. 내 연기가 설득력이 있을지 내적인 갈등을 엄청나게 했다.”
- 결정적으로 선택했던 계기는 무엇인가.
“이경영 선배의 말 때문이었다. 사실 김종태 역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고 하지 말까’ 고민하다 사적인 자리에서 감독님께 ‘60대 김종태가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된다. 이경영 선배가 김종태를 하고 내가 이두한 역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경영 선배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가 해’라고 꾸짖더라. 그 한 마디에 하게 됐다. 사실 어떤 핑계나 칭얼거림도 통하지 않았다. (웃음)”
- 어렵게 결심을 했다. 촬영 때도 고문 연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나.
“사실 ‘아차’ 싶었다. 그쪽으로 너무 신경쓰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첫 촬영이 물고문이었다. 연출부에서 거즈사이에 랩을 끼워서 실험을 했는데 물이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 하지만 발버둥을 치고 연기를 하니까 오히려 랩 때문에 숨을 쉬지 못했다. 그 방법이 안 되니까 순간 당황했고 어렸을 적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 무척이나 무서웠을 것 같다.
“내가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칠성판에 팔, 다리, 허리가 묶여있으니 물 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두려워 물소리만 나면 몸이 얼어버리니까 나도 당황하고 감독님도 당황해하셨다. 머리는 버텨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쉽게 되질 않았다.”
- 그렇다면 영화 속 장면은 어떻게 건질 수 있었나.
“결국 내가 공포를 이겨내야 했다. 그래서 감독님께 최대한 버텨보다가 내가 힘 있게 발버둥을 치면 ‘컷’하는 걸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근데 막상 ‘슛’이 들어가고 힘 있게 발버둥을 치니 상대배우들이 더 꽉 붙들더라. ‘아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엔 스크립터가 내가 견딜 수 있는 평균 시간을 재서 그 시간까지 찍을 수 있었다.”
- 보통 연기는 하면 할수록 적응이 된다고 하더라. 고문도 그랬나.
“고문 역시 적응이 됐다. 사실 영화니까 적응이 되는 거다. 시늉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적응’이 된다는 것이 또 다른 갈등이었다. 실제 고문을 받은 분들은 정말 힘드셨고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고통을 받으셨을 텐데… 고문에 적응이 되면 되는 건가 싶었다. 정말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마음이 참 많이 막막해졌다.”
- 아마도 감독님이 그 막막함을 관객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신 건 아닐까.
“그러신 것 같다. 내가 느꼈던 아픔을 관객들과 함께 공유하고 함께 아파하길 원하신 것 같다.”
- 실제로 상대배우들을 싫어졌을 때도 있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가.(웃음) 그런데 초반엔 진짜 그랬다. 고문을 받는데 내 몸이 건강하면 안 되니까 잘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상대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농담도 하고 간식을 먹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 예전부터 정말 존경하고 보기만 해도 설레는 이경영 선배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웃음) 그래서 괜히 남들과 동떨어져 있으려고 했고 괜한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 후배들이 엄청 눈치를 봤을 것 같다.
“맞다. (웃음) 후배들은 엄청 힘들었을 거다. 다른 선배들이 농담을 하면 웃길 텐데 내 눈치를 보느라 잘 웃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데 촬영 중반부터 나도 적응이 되니까 슬슬 농담도 하게 되고 얼렁뚱땅 간식도 하나씩 먹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스태프들에게 아직까지 미안하다는 말을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 故 김근태 의원도 ‘남영동’ 수기를 봤을 텐데 어떤 느낌을 받았나.
“수기에 적힌 ‘죽이고 싶도록 가장 미웠던 건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였다’라는 글에 크게 공감했다. 한 공간에서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웃고 있다. 이만한 모순이 또 어디 있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모순이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이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자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 故 김근태 의원이 살아계셨더라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쟤 고생 좀 하겠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격려해주셨을 것 같다. 인재근 의원님께서 촬영장을 방문하셨을 때 ‘박원상씨, 우리 남편이랑 많이 닮았네’라고 하셨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셨던 김 의원님의 허벅지가 굉장히 두꺼우셨는데 나도 허벅지가 두껍다. 그 허벅지가 영화 촬영 내내 콤플렉스였는데 인 의원님 한마디에 싹 날아갔다.”
- 사실 이 영화를 추천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런 것 같다. 영화를 보러오라고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이 참 어렵다. ‘재밌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잔인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열심히 홍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연기했으니 선입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105분 동안 함께 아파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부러진 화살’을 홍보할 때 라디오 방송에 감독님과 출연한 적이 있다. 그 때 감독님께서 ‘다음 작품은 ‘김근태 의원과 이근안의 이야기’로 갈 예정인데 ‘부러진 화살’팀과 다시 하고 싶다’라고 하셨다. 감독님께서 연이어 나를 써주신다는 게 굉장히 큰 의미였고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 ‘남영동’ 수기를 읽고 초고를 봤는데 그제야 ‘아!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영화만 보면 ‘고문’ 때문에 막막했을 거란 생각을 하던데 난 아니었다. 88학번인 내가 대학교를 다녔을 때 학생 운동이 참 많았다. 과친구들이 경찰서에 붙잡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연극 활동에 전념했다. 그런데 한평생 굳은 심지로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김근태 의원을 연기한다는 게 어려움이었다. 내 연기가 설득력이 있을지 내적인 갈등을 엄청나게 했다.”
- 결정적으로 선택했던 계기는 무엇인가.
“이경영 선배의 말 때문이었다. 사실 김종태 역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고 하지 말까’ 고민하다 사적인 자리에서 감독님께 ‘60대 김종태가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된다. 이경영 선배가 김종태를 하고 내가 이두한 역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경영 선배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가 해’라고 꾸짖더라. 그 한 마디에 하게 됐다. 사실 어떤 핑계나 칭얼거림도 통하지 않았다. (웃음)”
배우 박원상.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 어렵게 결심을 했다. 촬영 때도 고문 연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나.
“사실 ‘아차’ 싶었다. 그쪽으로 너무 신경쓰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첫 촬영이 물고문이었다. 연출부에서 거즈사이에 랩을 끼워서 실험을 했는데 물이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 하지만 발버둥을 치고 연기를 하니까 오히려 랩 때문에 숨을 쉬지 못했다. 그 방법이 안 되니까 순간 당황했고 어렸을 적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 무척이나 무서웠을 것 같다.
“내가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칠성판에 팔, 다리, 허리가 묶여있으니 물 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두려워 물소리만 나면 몸이 얼어버리니까 나도 당황하고 감독님도 당황해하셨다. 머리는 버텨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쉽게 되질 않았다.”
- 그렇다면 영화 속 장면은 어떻게 건질 수 있었나.
“결국 내가 공포를 이겨내야 했다. 그래서 감독님께 최대한 버텨보다가 내가 힘 있게 발버둥을 치면 ‘컷’하는 걸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근데 막상 ‘슛’이 들어가고 힘 있게 발버둥을 치니 상대배우들이 더 꽉 붙들더라. ‘아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엔 스크립터가 내가 견딜 수 있는 평균 시간을 재서 그 시간까지 찍을 수 있었다.”
- 보통 연기는 하면 할수록 적응이 된다고 하더라. 고문도 그랬나.
“고문 역시 적응이 됐다. 사실 영화니까 적응이 되는 거다. 시늉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적응’이 된다는 것이 또 다른 갈등이었다. 실제 고문을 받은 분들은 정말 힘드셨고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고통을 받으셨을 텐데… 고문에 적응이 되면 되는 건가 싶었다. 정말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마음이 참 많이 막막해졌다.”
- 아마도 감독님이 그 막막함을 관객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신 건 아닐까.
“그러신 것 같다. 내가 느꼈던 아픔을 관객들과 함께 공유하고 함께 아파하길 원하신 것 같다.”
- 실제로 상대배우들을 싫어졌을 때도 있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가.(웃음) 그런데 초반엔 진짜 그랬다. 고문을 받는데 내 몸이 건강하면 안 되니까 잘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상대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농담도 하고 간식을 먹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 예전부터 정말 존경하고 보기만 해도 설레는 이경영 선배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웃음) 그래서 괜히 남들과 동떨어져 있으려고 했고 괜한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 후배들이 엄청 눈치를 봤을 것 같다.
“맞다. (웃음) 후배들은 엄청 힘들었을 거다. 다른 선배들이 농담을 하면 웃길 텐데 내 눈치를 보느라 잘 웃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데 촬영 중반부터 나도 적응이 되니까 슬슬 농담도 하게 되고 얼렁뚱땅 간식도 하나씩 먹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스태프들에게 아직까지 미안하다는 말을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 故 김근태 의원도 ‘남영동’ 수기를 봤을 텐데 어떤 느낌을 받았나.
“수기에 적힌 ‘죽이고 싶도록 가장 미웠던 건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였다’라는 글에 크게 공감했다. 한 공간에서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웃고 있다. 이만한 모순이 또 어디 있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모순이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이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자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 故 김근태 의원이 살아계셨더라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쟤 고생 좀 하겠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격려해주셨을 것 같다. 인재근 의원님께서 촬영장을 방문하셨을 때 ‘박원상씨, 우리 남편이랑 많이 닮았네’라고 하셨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셨던 김 의원님의 허벅지가 굉장히 두꺼우셨는데 나도 허벅지가 두껍다. 그 허벅지가 영화 촬영 내내 콤플렉스였는데 인 의원님 한마디에 싹 날아갔다.”
- 사실 이 영화를 추천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런 것 같다. 영화를 보러오라고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이 참 어렵다. ‘재밌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잔인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열심히 홍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연기했으니 선입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105분 동안 함께 아파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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