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한 목소리에 차분한 말투. 그럼에도 연기에는 ‘힘’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는 여린 외모에서 무서울 정도로 강한 독기가 흘러 나온다. 배우 손여은이다. 14일 종영된 SBS 특별기획 ‘언니는 살아있다’(극본 김순옥, 연출 최영훈)에서 공룡그룹의 장녀 구세경 역을 맡은 손여은은 이 작품의 최대 수혜자. ‘금수저 악녀’의 표본을 연기했음에도 시청자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받은 유일무이한 캐릭터를 연기해 주목받고 있다.
“생각보다 제 캐릭터에 동정하고, 감정이입을 많이 해주셔서 놀랐어요. 구세경은 벌 받아 마땅한 데도 살려달라는 댓글이 많더라고요. 참 의외였어요. ‘당해도 싸다’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불쌍하다고 하세요. 현장에서도 ‘구세경이 왜 불쌍하냐’고 물어보세요. 물론 연기하는 저로서는 구세경이 불쌍하고 측은해요. 다 가진 척처럼 보이지만, 외로운 부분이 많아요. 고독한 캐릭터죠. 그 부분을 시청자들도 이해하신 것 같아요. 악녀라는 고정관념을 두고 연기하기보다는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시청자들이 그 점을 잘 공감해주신 것 같아 감사해요.”
의도치 않게 큰 사랑을 받게 된 손여은은 행복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조용한 성격을 깨고 독기를 품은 악녀 구세경으로 변신하는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소리를 계속 질러야 하는 연기가 힘들었어요. 평소에는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인데, 억지로 화를 내야 하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기가 나왔어요. 마음속에 화를 담고 연기하니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목소리도 트이면서 시원하게 내질렀어요. 현장에서는 ‘득음했냐’고도 하셨어요. (웃음)”
극 중 악녀였지만, 구세경은 시한부로 생을 마감했다. 또 손여은이 올해 연기한 캐릭터 대부분이 죽음을 맞았다. 유독 작품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 손여은은 “죽음 앞에서 사람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피고인’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촬영 후 단체 채팅방에 ‘죽으면 아무 소용없으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사는 게 최고다’라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정말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죽음 앞에 왔을 때 ‘이 일을 해야 했나, 말았어야 했나’를 생각하면 저를 되돌아보는 것 같아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느끼게 됐어요. 어떤 분이 자는 아이들 옆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제 시한부 연기를 보고 하루하루가 소중한 걸 느낀다고 하세요. 아이를 한 번 안아줬다고요. 그 말에 눈물이 나고, 보람을 느껴요. 그렇기에 ‘언니는 살아있다‘는 제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 작품이에요.”
최고시청률 24.0%(마지막 회, 닐슨코리아, 전국기준). ‘시청률 지옥’이라는 안방극장에서 ‘언니는 살아있다’는 방송사도, 제작진, 출연진도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연말 시상식에서는 출연진의 주요부문 수상이 관측되고 있다. 이에 대해 손여은은 “상에는 큰 욕심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연기대상이요? 사실 연기하면서 단 한 번도 상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어요. 상에 대한 욕심도 없고요. ‘상을 받겠다. 그래서 이 작품을 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연기에 임하면, 무언가에 지배되는 기분이 들어요. 연기를 즐기지도 못할 뿐더러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지도 않아요. 연기대상 후보는 과찬이에요. 기대는 전혀 없어요. 주신다면 좋겠지만, 욕심은 없습니다. (웃음)”
손여은은 ‘언니는 살아있다’ 연장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차기작은 검토 중이다.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남은 시간에는 체력을 보강하려고 한다. 더 좋은 캐릭터로 만나 뵐 수 있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동아닷컴 홍세영 기자 projectho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