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집값…우리 집은 어디에?

입력 2018-09-10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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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숨바꼭질’에서 성공한 사업가(손현주)는 사라져버린 형을 찾아 나선다. 형이 살던 낡고 더러운 아파트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망의 현실. 그 위협에서 그는 벗어날 수 있을까. 사진제공|NEW

■ 영화 ‘숨바꼭질’

치솟는 요즘 집값…전셋값마저 들썩
결국 갖지 못한 자와 가진 자의 대립
집에 투영된 한국사회 ‘욕망의 민낯’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집값이 폭등하는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한 올해 7월 현재 전국 평균 전세가율은 67.7%이다. ‘주택 매매가에 대비한 전세가의 비율’을 뜻하는 전세가율은 지난해 11월 68.7%에 달했다가 이후 계속적으로 낮아지며 하락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세가율은 높으면 높을수록 집값을 끌어올리게 마련이다. 전셋값이 집값에 가까워질수록 전세보다 매매를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 그만큼 집값도 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갭(gap)투자자’가 등장한다. 전세가율이 높을 때 전셋값과 집값의 차액에 해당하는 돈으로 일단 전세를 끼고 집을 산 뒤 전세계약이 끝나면 전셋값을 올려 받으려 하거나 집을 팔아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이들이다. 전세가율이 낮아지면서 그 욕구도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집값이 치솟는 등 부동산시장이 과열되는 사이, 조금씩 낮아졌던 전셋값도 다시 꿈틀대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정책도 동시에 거론되고 있다. 보유세 등 세금을 올리거나 투자 이익을 노리는 무리한 전세대출을 억제하려는 수단 등이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해 전세를 사는 이들에게나, 그들로부터 더 많은 전셋값을 받아내려 대출을 통해서라도 집을 사들이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나 녹록하지 않은 세월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아무래도 없는 이들, 갖지 못한 자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노래 ‘독도아리랑’의 싱어송라이터 한돌은 이미 오래 전 그 아픔을 이렇게 쓰고 불렀다.

‘오늘은 우리집이 이사를 간다/쌓아놓은 행복들도 따라오려나/뒤돌아 바라보면 내가 살던 집/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달려라 달려라 짐 실은 차야/엄마 울지 마세요.’(노래 ‘못생길 얼굴’)

돈이 없거나 모자라 집주인의 요구에 응할 수 없어 결국 자신들의 소박한 터에서 밀려나야 하는 사람들, 아니면 재개발의 위협 앞에서 또 다른 자리를 찾아 떠나가야 하는 이들의 아픔일 것이다. 집과 주택이 더 이상 안온한 주거공간이 될 수 없는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늘 떠나고 밀려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더 많이 갖고 싶은 자들의 욕망이다.

영화 ‘숨바꼭질’의 한 장면. 사진제공|NEW


● ‘집=불로소득’? ‘집≠불로소득’?

이 같은 욕망은 경제학의 수많은 개념 안에서 숱한 논쟁을 몰고 오곤 했다. 이는 때로 땅과 부동산을 지닌 이들의 부가 정당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규명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세기 초반 데이비드 리카도는 ‘차액지대론’을 통해 그런 부가 정당하지 않은 것임을 따져 물었다. ‘지주는 자본가에게 땅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지대를 받는다. 자본가는 빌린 지주의 땅에서 얻는 수확물로 이익을 얻는다. 수확물은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을 통해 확보된다. 문제는 각 토지마다 비옥도가 달라서 수확물의 양과 그로 인한 이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본가는 비옥도가 뛰어난 토지를 더 많은 지대를 주고 빌리려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익이 커지지는 않는다. 모든 자본가의 바람도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되는 자, 바로 지주이다’고 리카도는 주장했다.

19세기 말 그 유명한 책 ‘진보와 빈곤’을 내놓은 미국의 헨리 조지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좀 단순과격하게’ 표현하면, 토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얻는 생산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어서 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은 ‘불로소득’이라고 봤다. 이어 산업이 발전하면서 토지의 가격도 계속 오르게 되고, 지가 상승에 대한 기대는 결국 투기를 불러와 다시 지가를 올려놓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불로소득’은 더욱 커진다. 이렇게 커진 이익을 ‘단일토지세’의 이름으로 걷어 들여야 한다고 헨리 조지는 말했다. “누구든 생산에 필요한 토지를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하라! 그러나 토지의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모두 세금으로 징수하여 만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라!”(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는 것이다.

헨리 조지의 주장은 그대로 정책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토지로 대표되는 부동산에 대한 투기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리를 막기 위한 다양한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적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헨리 조지의 이름이 최근 집값 폭등의 사태 안에서 다시 그 이름이 호출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그만큼 ‘토지(의 이익)=불로소득’의 등식 혹은 부등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랜 세월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영화 ‘숨바꼭질’의 한 장면. 사진제공|NEW


● 욕망은 욕망을 잠식한다

‘부동산’으로 통칭되는 땅과 집을 둘러싼 세상의 이해관계는 그토록 매우 첨예한 것이기도 하다. 시선의 부딪침은 때로 폭력적 사태를 불러온다. 아니 폭력은 이미 인간이 욕망을 갖기 시작하는 때부터 태동하는 것은 아닐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서울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딸을 혼자 키우며 살아가는 여자도 현실의 그런 위태로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위태로움을 견뎌내지 못할 바에야 여자는 폭력을 택했다. 여자는 엄연한 남의 집에 침범해 마치 자신의 집인 양 그 안에서 지내는 안온한 일상을 꿈꾼다. 꿈은 살인의 범죄로까지 그를 밀어붙여 결국 끝 간 데 모를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욕망은 오래가지 못하며 부질없다.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며 버젓한 남의 집을 “우리집”이라 우기다 비극적 종말을 맞는 여자의 모습이 섬뜩한 것은 단지 그 폭력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집과 그 가치가, 이를 가지려는 자의 ‘불로소득’을 향한 아득한 욕망의 크기에 결코, 영원히, 부응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더욱 현실적 공포로 다가오는 건 아닐까.

그런 공포 속에서 오늘도 얼마나 많은 소박한 꿈은 사그라지고 마는가.

‘콩도 심고 / 팥도 심고 / 고구마도 심으련만’이라며 ‘소중하고 귀중한 / 우리 땅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돌은 노래 ‘땅’에서 물었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 얼마나 좋을까 / 울 어머니 살아생전에 / 작은 땅이라도 있었으면’이라고 노래한 한돌의 꿈은 그저 그렇게 사그라지고 말 소박함에 머물고 마는 것일까.

영화 ‘숨바꼭질’의 한 장면. 사진제공|NEW


■ 영화 ‘숨바꼭질’은?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숨어 살고 있다’는, 이른바 ‘도시괴담’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어온 ‘숨바꼭질 괴담’을 모티브 삼았다. 성공한 사업가가 형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의 행방을 좇다 폭력적인 위협에 시달린다. 위협은 안온한 주거의 공간인 자신의 아파트로 향해온다. 집을 가지려는 자의 극단적 욕망을 공포와 스릴러의 분위기로 그려냈다. 2013년 신예 허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손현주, 문정희, 전미선이 주연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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