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맑고, 어느 날은 흐리다. 건조할 때도 있고 습한 기운에 불쾌함이 더해질 때도 있다. 사람 감정 변화까지 좌지우지하는 날씨. 이 변덕스러운 녀석을 매일 같이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기상청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열대야보다 뜨겁고 국지성 호우보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존재한다. JTBC 토일드라마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연출 차영훈 극본 선영 크리에이터 글Line&강은경, 약칭 ‘기상청 사람들’)이다. 국내 최초로 기상청 사람들을 오롯이 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심에 되는 인물인 기상청 총괄 2과 총괄예보관 진하경(박민영 분)은 일이면 일, 자기관리면 자기관리, 매사에 똑 부러진다. 공과 사 구분이 확실하고, 대인관계마저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진하경은 똑똑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5급 공무원으로 기상청에 들어온 인물이에요. 주변 시기, 질투가 많을 수밖에 없어요. 자신보다 훨씬 선배인 사람들도 부하 직원으로 이끌어야 해요. 진하경이 냉정하고 완벽주의자처럼 태어났을 수도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성격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상황에 크게 감정 변화를 일으키기보다 자신만의 체계에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해요. 이런 점을 중심으로 진하경을 구축해 나가려고 했어요.”
언뜻 진하경과 박민영은 비슷한 듯 다르다. 이 점은 박민영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진하경은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이에요.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의 쿨(Cool)함도 있어요. 그 부분은 저와 많이 달라요. 반대로 저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저 역시 일할 때는 완벽주의 성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일에서는 게으르지 않아요. 부지런한 편에요. 제 일에 있어서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제가 가장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고 공부하고 연구하죠. 이 점은 진하경과 닮았어요.”
냉철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진하경이 크게 감정 동요를 일으킨 일으키는 장면은 ‘기상청 사람들’ 명장면으로 꼽힌다. 결혼을 앞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 파혼을 선언한 전 연인 한기준(윤박 분)을 향해 육두문자(肉頭文字)까지 쏟아내는 진하경. 그리고 이 감정을 오롯이 연기한 박민영에게도 해당 장면을 특별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에요. 두 사람이 함께한 10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나요? 교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과 10년을 함께한 커플은 달라요.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감정의 깊이가 다르죠. 지나 10년을 한순간에 잊어야 할 만큼의 절망을 연기하려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폭발했어요. 연기할 때 그 감정을 절제할 정도로요. 그만큼 1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파는 커요. 그 장면을 찍을 때는 힘들었는데, 기분은 좋았어요.”
같은 여자로서, 아니 한 사람으로 캐릭터 상황에 오롯이 젖어 들었던 것일까. 극 중 진하경이 눌렀던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은 박민영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됐다. “결혼 전이니, 불륜이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다른 여자와 예비 신혼집에서 관계를 하는 남자친구를 목격하는 진하경이 비를 맞으며 한기준을 가방으로 때리는 장면은 제 의견을 낸 부분입니다. 저도 여자고, 비슷한 나이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게 배신감을 평이하게 연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감정을 더 해졌고, 촬영 후 이 부분에 대해 감독님께 조심스럽게 말하니 ‘좋다’고 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박민영이 진하경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파경을 맞게 된다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먼저 이별하는 슬픔에 잠겨 있을 것 같아요. 충격과 배신감,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거예요. 그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똥차’를 치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극 중 ‘조상이 도왔다’는 대사가 있어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빠르게 회복할 것 같아요. 해석하기 나름 아닐까요. 결혼 상대와 어떤 감정이고, 어떻게 헤어지느냐에 따라 타격과 상실감이 크겠지만, 전 운명론자라 저와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리할 것 같아요. 진짜 진하경 입장에서는 (똥차 가고 새 차가 왔으니) 아주 좋은 일이죠.”
하지만 진하경에 몰입했던 그 순간 감정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연기할 때 시원할 줄 알았는데 슬펐어요. 정말 시원한 대사고 그 장면을 보면 웃기는데, 막상 ‘X새끼’라고 시원하게 내뱉지만, 대사하는 입장에서는 10년을 이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슬프더라고요. 보는 사람은 시원했고, 대사를 내뱉는 사람을 슬픈 장면이었어요.”
원칙주의자 진하경 캐릭터 변화시킨 ‘원흉’인 한기준 캐릭터는 진하경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녀를 버리고 채유진(유라 분)과 결혼까지 해버린다. 이런 한기준에 대해 박민영은 “킹 받는다”(열 받는다)고 말했다. “매번 킹 받아요(열 받아요). 촬영 때마다 너무나 화나고 꼴 보기 싫고 그 지질함이 싫어요. 이해되지 않아요. 정말 한기준 캐릭터는 윤박 아니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밉상 캐릭터를 잘 소화해줬어요. 뭐랄까요. 그여서 덜 밉고,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 캐릭터가 완성됐어요. 한기준과 달리 윤박은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배우로서 봤을 때도 좋은 사람입니다. 이번에 너무 좋은 배우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같이 연기하면서 즐겁고 재미있고 호흡도 잘 맞아요. 다른 작품에서도 만나고 싶어요. 물론 캐릭터만 보자면 킹 받아요(열 받아요). (웃음)”
윤박은 좋지만 한기준 캐릭터에 대한 반감은 드라마 종영 후에도 강하게 남아있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시쳇말로 ‘극혐’(극도로 혐오하다)임을 드러냈다. “전 한국 사람입니다. 저도 할리우드 사람들처럼 쿨(Cool)하면 좋겠는데, 영어를 조금 할 줄 알뿐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에요. 아직 깨어있지 않아요. 저는 제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간 남자와 다시는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저와 진하경이 다르다면 그 점은 분명히 달라요. 아기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한기준) 손도 싫습니다. 왜냐면 제가 ‘목격’했잖아요. 저는 그렇게 넓은 아량을 지닌 사람이 아니에요.”
박민영은 다작 배우다. 큰 공백 없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늘 성공만 뒤따르지 않는다. “작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다행인 것인지, 매 작품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도 그런 것 같아요. 업이 있으면 다운이 있고, 다운이 있으면 업이 있어요. 올라가다 보면 내려갈 수도 있고, 내려가다 보면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잠시 주춤하더라도 열심히 할 수 있으면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또 한참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리막길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도전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때로는 뭘 보여주고 변신하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발전하려고 해요.”
박민영은 자신을 대한민국 날씨에 비교한다.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저도 봄·여름·가을·겨울이 명확하고 확실해요. 가끔은 태풍이 오고, 가뭄에 들고, 홍수가 나요. 제 나이에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겪었어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일기를 다 공개할 수 없지만, 제 연기는 늘 항상 그 안에서 싸우고 있어요.”
조곤조곤 거침이 없는 박민영이다. 아닌 것에 아님이 분명하고 유머와 위트로 넘길 수 있는 부분에는 큰 웃음과 미소로 화답한다. 배우 생활 20년 차. 박민영은 여전히 캐릭터와 치열한 내전을 벌이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캐릭터와 혼연일체 되는 연기를 하는 배우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앞으로 또 박민영은 어떤 캐릭터로 대중들을 이해시킬지 그의 연기 행보가 주목된다.
동아닷컴 홍세영 기자 projectho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