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유령’ 주연 배우 박소담의 인터뷰. 이날 박소담은 오전부터 이어진 인터뷰에 목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성심성의껏 답변하며 열의를 다했다.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 스파이 액션 영화. 박소담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 이어 이해영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이 감독이 “미친 텐션 한 번 해보자”며 제안한 작품이라고. 박소담은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다”며 “한 작품 내에서 다양한 옷도 입어보고 다양한 언어와 말투, 감정을 연기할 수 있는 게 진짜 큰 복이지 않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하는 내내 재밌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박소담은 ‘유령’에서 도발적인 매력을 무기 삼아 조선인임에도 총독부 실세인 정무총감 비서 자리까지 오른 야심가 ‘유리코’를 연기했다. ‘유리코’는 호텔에 갇힌 뒤 경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팎을 휘젓고 다니며 거칠게 대립하는 인물. 말다툼도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거칠게 온몸을 내던지는 캐릭터다.
박소담은 ‘유리코’를 표현하기 위해 강도 높은 액션을 소화했다. 4kg 이상의 장총을 들고 이리저리 구르고 뛰기까지 액션스쿨에서 두세 달 연습에 매진했다. 박소담은 “총과 내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었다. 연습용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연습했고, 손목과 발목을 강화하는 운동도 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뛰지도 못한 상태였는데 원테이크로 갈 수 있을 정도로 해냈을 때 너무 뿌듯했다”고 털어놨다.
번아웃인 줄 알았는데…갑작스러웠던 갑상선 유두암 판정
혼신의 힘을 쏟았지만 아쉽게도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유령’ 촬영 기간 알 수 없는 피로감과 우울감에 힘든 시간을 보낸 박소담은 그 시기를 “버텨서 이겨냈다”고 회상했다. 2021년 5월 ‘유령’ 크랭크업 이후에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일정을 강행했다. 그해 10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아 영화제 일정까지 소화했다. 그 이후에야 건강검진을 받았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갑상선 유두암’ 판정을 받은 것.박소담은 “‘일했으니까 힘들 수 있지. 잘 쉬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했다. 번아웃이 온 줄 알았지 몸이 아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서 건강검진을 하고 싶어서 부산국제영화제까지 끝내고 간 것”이라며 “담당 교수님이 ‘꽤 오래 많이 힘들었을 텐데 왜 몰랐냐’고 하시더라. 촬영 현장에 먼지가 많고 원래 목이 아파서 그런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폐까지 전이됐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라. 목소리를 잃을 뻔 했다. 다행히 항암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수술 후 6개월 정도는 내 목소리가 안 나왔고 그 이후에도 내 목소리를 찾는 과정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도 말을 많이 하거나 높은 소리는 힘들다. 약도 몇 년 이상 꾸준히 먹어야 하고 몸도 계속 살펴야 하는데 어떤 작품이 와도 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박소담은 2021년 12월 수술을 받고 약 1년간 공백기를 보냈다. 한 달 후 주연 영화 ‘특송’이 개봉했지만 아쉽게도 홍보 일정에 함께하지 못했다. 지난해 6월과 11월 각각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참석해 근황을 알리기도 했지만 찰나였다. 공교롭게도 배우로서의 복귀작은 이번 영화 ‘유령’. 지난 11일 언론시사회 직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박소담은 복귀 소감을 전하며 눈물을 쏟았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배우 이하늬와 이해영 감독까지 울컥하면서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박소담은 “내가 좋지 않았던 몸 상태를 본 분들이라 다함께 운 것 같다. 이하늬 선배가 연기한 박차경의 대사 ‘살아. 죽어야 할 때 그 때 죽어’를 듣는 순간 2년 전의 나로 돌아갔다. 힘들었던 나를 선배님이 살려준 것 같았다. 감정 조절이 안 되어서 눈물이 터졌다”면서 “선배들이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를 정말 많이 주셨다.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유리코를 연기할 수 있게 이끌어주셨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왜 나는 여기에 끼지 못하나’ 싶어서 자책도 많이 했고 선배들 앞에서 ‘저 연기 잘 못한 것 같아요’라며 울기도 했다. 감독님과 선배님들의 도움 덕분에 유리코를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서른둘,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다
수술부터 복귀까지 약 1년. 안식년을 보낸 박소담은 서른둘에 처음으로 ‘쉼’이란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심적으로 힘든 시기였을 텐데도 사이사이 좋았던 기억들을 꺼내 전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박소담은 “아프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잘 아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나는 쉬는 날에도 무언가 했다. 가만히 있는 게 뭔지 몰랐다”면서 “어쩔 수 없이 두 달간 누워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배우는 비워내는 작업을 잘 해야 하는데 나는 모든 것을 꾹꾹 담아내고 채우려고만 했던 것 같다. ‘팬들을 오래 뵈려면 비워내는 게 필요하겠구나’ 온몸으로 느꼈다. 이제는 내 상태를 잘 들여다보고 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10월에는 해외여행도 처음으로 혼자 다녀왔다. 특별한 계획 없이 열흘 정도 어림잡았던 유럽 여행은 자유롭게 흘러가다 한 달을 훌쩍 넘겼다고. 런던에서 ‘기생충’ 봉준호 감독과 샤론 최 감독, 이정은 배우와도 깜짝 조우했다. 샤론 최 감독의 강력 추천으로 아이슬란드까지 즉흥으로 다녀왔다.
박소담은 “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두려웠는데 혼자 여행하면서 나에게 많이 질문하게 되더라. 어디 가보고 싶은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 빙하 투어를 하려고 하루에 6시간 동안 운전하기도 했다”면서 “감사하게도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예의상 바르셀로나에서 화장품도 샀다. (외적으로) 갖추고 있으면 서로 좋지 않나”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박소담은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만난 비연예인 동생들을 이번 영화 ‘유령’ 시사회에도 초대했다고 밝혔다. 갑상선 유두암을 수술해주신 교수님도 초대했다고. 그는 “시사회에 내 손님이 제일 많았다고 하더라”고 웃으며 “시사회 날 ‘소담이 되게 행복해보였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목소리로 인사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유령’을 통해 배우로서 활동을 재개한 박소담은 컨디션 회복에 힘쓰며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박소담은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나도 너무 궁금하다. 많은 분들에게 걱정 끼치고 많이 못 보여드린 만큼 꼭 작품이 아니어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라며 “그런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시작을 ‘유령’으로 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