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는 아내? 천진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아이? 꼬리치며 좋아하는 바둑이? 하루의 고된 일과를 털어놓을 수 있는 룸메이트? 푹신한 침대와 달콤한 휴식? 나의 경우에는 위의 것들과는 거리가 먼 설거지 거리와 빨래와 먼지, 때로는 낮에 끝내지 못한 일 더미가 나를 반긴다. 물론 아이가 반갑기는 하지만 밖에서 일하고 들어와서 쉼 없이 또 집안일을 하다보면 잔소리도 하게 되고 짜증도 내게 된다. 하지만 나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고단하고 남루한 하루의 끝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돌 스타(주로 청소년에게 큰 인기를 얻는 연예인)의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현상)이다. 일과를 끝낸 늦은 시각 컴퓨터를 켜고 내가 들어가는 곳은 즐겨찾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돌 스타의 팬 블로그들. 언제부터인가 나도 개인 블로그를 팬 블로그처럼 사용하면서 이들과 소통하고 있다. 물론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이 팬 블로그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나는 나이를 속이고 있다. 아니, 속인다기 보다는 굳이 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렇게 나이, 성별, 국적, 외모, 계급, 계층의 구분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인터넷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미 10대에 구미의 팝가수들과 조용필의 광팬으로 살았던 나는 요즘 몇 십 년 만에 다시 피가 끓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물론 스타가 주는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은 팬덤 자체이다. 팬덤이 생산하는 문화, 그 안에서 오고가는 대화는 나를 놀라게 한다. 사회 최하위 계층으로 자신들을 분류하는 10대, 20대 여성 ‘빠순이’는 사실 대중문화 생산자이자 평론가이다. 아주 유쾌하고 시니컬하며 촌철살인의 마수를 휘두르는 이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림의 고수들이다. 답답했던 내 마음의 물줄기를 터주는 이들은 나만의 아이돌이다. 물론 같은 스타를 추종한다 하더라도 팬덤은 천차만별인데, 결국은 자기 성향과 취향을 찾아가게 되고 비슷한 부류끼리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찾은 몇몇 팬 블로그는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안식처이다. 하루라도 이들의 블로그를 들르지 않으면 궁금하여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윤 재 인 비주류 문화판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프리 랜서 전시기획자. 학교를 다니지 않는 17살 된 아이와 둘이 살고 있다. 생긴 대로 살아 가도 굶어죽지 않을 방법을 모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