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구내식당의 잔치국수와 녹두전.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구내식당의 잔치국수와 녹두전.



창밖은 아침부터 무거운 회색빛이었다. 충정로 사옥의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는 굵었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날, 점심 메뉴 선택지는 좁아진다. 사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은색 스테인리스 대접 속에 하얀 소면이 타래를 틀고 누워 있다. 그 위로 노란 달걀지단과 주황색 당근, 초록색 호박채가 정갈하게 놓였고, 검은 김 가루와 빨간 고춧가루가 무심하게 얹혔다. 곁들여진 찬은 노릇하게 구워진 녹두전 한 조각과 아삭한 오이무침, 그리고 쌉싸름한 도토리묵.

투박한 식판 위 구성만 보면 영락없는 ‘잔칫상’의 축약판이다. 하지만 이 화려한 오방색의 향연을 내려다보는 A씨의 눈동자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갈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백하게 ‘당황’이라는 두 글자가 미간에 새겨져 있었다.

“잔치국수 대접하겠다더니… 설마 구내식당이었습니까?”

사건의 발단은 이틀 전이었다. 이런저런 회사 일로 신경 쓰다 눈이 퀭해진 나에게 A씨가 지나가듯 툭 내뱉었던 한마디.

“가끔은 말입니다, 그저 매끈하게 넘어가는 잔치국수 한 그릇이 간절해질 때가 있죠.”

영국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미식에 조예가 깊은 그가 ‘잔치국수’라는 소박한 메뉴를 입에 올렸을 때,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운명적으로 구내식당 주간 메뉴판에서 ‘잔치국수와 녹두전’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A씨, 오늘 점심에 약속 없으시면 잔치국수 어떠십니까.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나의 제안에 그는 화답했고, 그렇게 우리는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17층, 점심 인파로 바글바글한 구내식당 줄 사이에 서게 된 것이었다.

A씨는 여전히 젓가락을 들지 않은 채, 국물 위에 뜬 고춧가루를 하나하나 셀 듯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한국인 90%가 ‘국수’ 하면 이 잔치국수를 떠올리죠. 흔히 조선 시대에 밀가루가 귀해 잔치 때나 먹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민간 어원설’일 뿐입니다.”

“그럼, 예로부터 잔치국수가 잔칫날 먹던 게 아니라고요?”

내 질문에 A씨는 젓가락으로 호박채를 살짝 헤집으며 ‘지식 폭격’을 시작했다.

“조선의 고조리서를 보면 주된 국물은 고기 육수에 간장을 넣은 장국이었고, 면은 주로 메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는 이 하얀 소면(素麵)은 19세기 초 ‘규합총서’ 등에 ‘왜면(倭麵)’이라 기록되어 있어요. 즉, 일본에서 유입된 식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잔치국수’라는 명칭 역시 1945년 노천명 시인의 시집 ‘창변’에서나 처음 확인될 정도로 비교적 현대적인 이름입니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접을 가리켰다.

“이 식당의 방식은 흥미롭군요. 보통 잔치국수의 고명은 따로 볶아 얹는 게 정석이지만, 여기는 호박과 당근을 육수에 넣고 함께 끓여냈네요. 이건 조리법상 ‘멸치 칼국수’의 정석과 같습니다. 면만 소면을 썼을 뿐, 국물의 깊이와 채소의 감칠맛이 배어 나온 점은 칼국수의 정서에 더 닿아 있죠. 북한에서는 잔치국수를 ‘깡깡이 국수’라고 부른다는 건 아십니까?”

“깡깡이 국수요? 그러고 보니 영화 ‘강철비’에서 정우성, 곽도원 국수 먹방 씬에서 본 거 같기도 합니다. 그 장면 아주 좋아합니다.”

“하나 더. 잔치국수의 생명은 ‘온도’에 있습니다. 너무 뜨거우면 면이 퍼지고 실제보다 싱겁게 느껴지거든요. 잔치국수의 다른 이름이 ‘온면(溫麵)’인 이유도 먹기 좋은 따뜻한 온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쏟아져 몸이 으스스한 날에는, 평소보다 약간 더 뜨거운 이 ‘칼국수식 잔치국수’가 오히려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겠군요.”

A씨는 드디어 한 젓가락을 크게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펴졌다.

“오… 생각보다 훌륭하군요. 멸치 육수 베이스에 김 가루와 고춧가루의 배합이 칼칼하니 좋습니다. 사실 잔치국수는 탄수화물 덩어리라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포만감이 늦게 와서 과식하기 쉬운 ‘위험한’ 음식이지만… 오늘 같은 날씨엔 이만한 위로도 없죠.”

그의 호평에 살짝 경직되었던 내 얼굴 근육도 스르르 풀렸다. ‘미식계의 고르고 13’ 같은 미식가의 입에서 “맛있다”는 소리가 나오게 할 만큼, 오늘 구내식당의 ‘칼국수 소울’을 품은 잔치국수는 괜찮았다.

중년 남성 둘이 탄수화물의 위험성을 논하며 국수를 순식간에 비워냈다.
“다음엔 제대로 된 중면(中面) 노포를 가야겠지만… 오늘 점심은 꽤나 ‘잔치’다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A씨가 말했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인생이 뭐 대단한 잔치겠는가. 비 오는 날, 뜻맞는 사람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 나누고 “맛있다”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을. 가늘고 긴 국수 가닥처럼, 우리의 인연도 그렇게 뜨끈하고 든든하게 이어지길 바라며 나는 다시 편집국의 종이 냄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