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이필과 이정찬 산송 소지. 사진제공 ㅣ 한국국학진흥원

고성 이씨 이필과 이정찬 산송 소지. 사진제공 ㅣ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 묘지 분쟁 ‘산송’, 장묘문화 변화로 역사 속으로
묘소는 조상이 잠들어 있는 경건한 장소다. 생전에 부모를 봉양하듯 묘소를 살피고 가꾸는 것은 자손의 당연한 도리로 여겨져 왔다. 특히 유교문화가 성행했던 조선시대에는 묘소 관리가 중요한 의례로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묘지를 둘러싼 소송인 ‘산송(山訟)’이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에 따르면 현재 1천여 점의 산송 관련 자료가 소장돼 있다. 산송은 노비소송·전답소송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소송 중 하나로, 부계 조상을 중시하는 유교 이념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18~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분쟁의 원인은 대부분 ‘투장(偸葬)’, 즉 타인의 묘역에 불법으로 시신을 몰래 매장하는 행위였다. 이 경우 피해자는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송 문건인 ‘소지(所志)’를 제출했고, 수령은 현장을 직접 확인하거나 대리인을 보내 판결을 내렸다.

실제 사례도 남아 있다. 1881년 안동의 고성이씨 문중은 선산의 명당 자리에 누군가 불법 매장을 했다며 관아에 소지를 제출했다. 당시 안동부사는 조사 끝에 즉시 파내도록 지시했다.

또 1890년 경북 예천에서는 유병호가 이웃 윤이출이 불법 매장을 강행하고, 항의하던 문중 사람들을 결박하고 폭행까지 했다며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예천 관아는 윤이출을 불러 죄를 묻고 무덤을 이장하도록 명령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묘지 분쟁이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하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장묘문화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화장 통계에 따르면 국내 화장률은 92.9%에 달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매장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이제는 화장이 장묘문화의 표준이 됐다.

화장의 확산은 납골당·수목장 등 다양한 형태의 추모 방식으로 이어졌다. 경북 안동의 진성이씨 주촌종가는 문중의 고령화로 벌초와 묘제 유지가 어려워지자 종택 뒤편에 52기의 비석을 모아 추모제단을 조성하고 합동묘제를 지내고 있다. 주촌종손은 “젊은 인력이 줄어 수많은 묘소를 관리하기 어려워졌다”며 “조상들의 혼령을 추모제단에서 모시고, 묘소는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순리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영화 <파묘>에서도 알 수 있듯 과거 산송은 임금이 직접 중재에 나설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였다”면서 “그러나 화장 문화의 정착으로 묘소 분쟁은 사라졌고, 산송 자료는 오늘날 사라진 묘소문화와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안동 ㅣ나영조 스포츠동아 기자 localdk@donga.com


나영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