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기자가간다]“공부하는슛돌이…땡땡이는없었다”

입력 2009-05-27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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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표야, 알지? 상대 수비 신경 쓰지 말고 평소 연습하던 걸 보여주란 말이야.” 김동석 코치(가운데)가 경기 중 선수들에게 큰 소리로 주문하고 있다. 전술 지시는 엄두도 못 내는 윤 기자는 “얼마 안 남았다. 힘내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유 감독의 뭔가 못 마땅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혹시 윤 기자가 무슨 실수라도? 수원·용인|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주말리그축구코치출동!
《2교시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쯤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고 트레이닝복 차림의 학생들 몇몇이 들어온다. 교사와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잠시. 이들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비어있는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업은 계속된다. 기자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다녔던 서울 M 중·고등학교 축구부 학생들의 수업 풍경은 대강 이렇다. 간혹 축구부원들에게 “너희들도 공부해야 한다. 어서 교과서 펴라”고 말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어차피 형식적인 요구일 뿐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안다. 책상 위에 엎드려 단잠을 청하던 이들은 4교시가 끝나면 다시 합숙소로 돌아가 ‘훈련 후 휴식, 훈련 후 연습경기 또는 실전경기’라는 그들만의 일상을 소화하기 바빴다.

대한축구협회가 올해부터 ‘공부하는 축구선수 육성’을 목표로 초·중·고 주말리그를 출범했다. 전국대회, 합숙훈련, 전지훈련 등으로 인한 결석으로 학생들의 기초학습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데다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토너먼트 대회 입상을 중시하다보니 학원축구가 ‘즐기는 축구’, ‘내실 있는 축구’가 아닌 성적에만 연연하는 축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 주말리그 출범 후 학교 캠퍼스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경기도 수원 수성중학교 축구부를 찾아가봤다.》

막내 코치의 기본은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다. 수성중 김경환 코치(왼쪽)가 경기에 앞서 메모하는 모습을 윤태석 기자가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수원·용인|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오늘은 새끼코치

오늘 기자의 미션은 수성중학교 코치. 선수로 직접 체험을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코치로 16일 토요일 오후 축구부 학생들의 하루를 간접 체험해보기로 했다. 수성중은 유규삼 감독을 필두로 김동석 코치, 박현규 골키퍼 코치, 김경환 코치가 40명의 축구부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기자는 막내 김경환 코치 바로 아래 ‘새끼코치’쯤 되겠다. 비록 정식 지도자는 아니지만 축구협회의 협조로 오늘 벌어질 경기에서 벤치에 앉을 수 있는 특권(?)도 부여 받았다.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겐 자꾸 전화가 오고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자꾸 피하려 하고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데 소개를 받으러 나간 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나오는 거야∼’까지는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체험 당일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를 보니 마음이 어수선하다. “야, 비 많이 오네. 그림(사진)은 잘 나오겠는데.” 선배의 격려 아닌 격려를 받으며 수성중으로 향했다.

 


○운동부는 두 배 이상 노력해야

수성중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수원 시 뿐 아니라 오산, 안성 등지에서도 수성중을 찾는 학생들이 꽤 있어 축구부는 주중 합숙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아직 학생들은 깊은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 합숙소 1층에 있는 식당에는 오늘 경기를 앞두고 학생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40명 축구부원들의 보금자리인 ‘영재관’. 1층에는 식당과 샤워실, 공부방이 마련돼 있고 2층에 숙소가 있다. 원래 학교 강당 한 편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숙소로 사용했지만 축구부 식구들의 염원을 담아 작년 5월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영재관’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수성중 조태희 교장은 “운동부 숙소라는 우락부락한 이미지를 지우고 아이들에게 좀 더 열심히 학습하라는 의미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운동만 해도 고될 판에 학교수업까지 정상적으로 소화하려니 학생들은 “솔직히 조금 피곤하다”고 푸념이다. 오전 8시 축구부 미팅을 마친 후 8시 20분에 등교, 아침조회를 포함해 모든 수업을 듣는다. “축구부 학생들은 아침조회라도 제외시켜 줄 수 없겠냐”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운동부라고 절대 특권은 없다’는 게 학교방침. 조태희 교장은 “운동을 하려면 공부만 하는 친구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야 된다”고 늘 강조한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오후훈련을 한 뒤 일주일에 2∼3차례씩 갖는 연습경기를 마치고 나면 숙소에 들어오는 시간이 오후 10시가 훌쩍 넘는다. 수성중 김진범 체육부장은 “수업 끝나고 여기저기 학원 다니는 일반 학생들보다 얘들이 훨씬 더 피곤해한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수업시간에 땡땡이? 적어도 수성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축구부원들은 수업이 끝나면 매 시간 담당 과목 교사에게 사인을 받아 제출해야 한다. 눈여겨 볼 점은 수성중은 이미 축구협회가 초중고 주말리그를 출범하기 한참 전인 4∼5년 전부터 운동부 학생들에게 모든 수업을 듣도록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주말리그 출범 후 모든 수업을 듣는 것에 특별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조태희 교장과 유규삼 감독이 그 동안 의기투합해 추진한 결과물이다.

 


○장대비 속에 값진 승리

오전 11시 30분이 넘어서니 학생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낸다. 경기 시간은 오후 2시. 장소는 경기도 용인 축구센터 내 인조잔디구장. 식단은 밥과 된장찌개. 된장찌개가 소화가 잘 돼 경기 날엔 주 식단으로 선택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경기 준비에 들어간다. 근육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부상을 막기 위한 테이핑도 보통 이 시간에 이뤄진다. 혼자서도 능숙한 솜씨로 테이핑을 하고 있는 (이)관표(15)에게 다가가 거들어 준답시고 압박붕대를 빼앗았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하려니 역시 어설프다. 점점 불안해하는 관표의 얼굴을 보니 괜스럽게 손이 더 꼬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김동석 코치. “큰일 났네. 관표가 우리 팀 에이스인데.” 관표는 경기 중 종종 발목을 삐끗하곤 해서 테이핑은 필수라고 한다.

오늘 장대비를 뚫고 수성중과 맞붙을 상대는 청담중. 수성중은 안용중, 원삼중, 과천문원중, 율전중, 수원중, 청담중, 오산중, 고천중, 신한중과 함께 경기 남부 권역에 속해 있다. 앞선 두 경기에서 내리 패해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한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려 운동장 대신 실내 미니 축구장에서 몸 풀기가 이뤄진다. 김동석 코치는 주전 선수들을 데리고 가벼운 러닝과 볼 터치 훈련에 주력하고 김경환 코치는 1,2학년들과 함께 볼 뺏기로 긴장감을 푼다. 한 편에서는 박현규 코치가 골키퍼 (김)동현이를 데리고 맹훈련중이다.

앞에서 축구협회의 협조로 오늘 벤치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고 자랑스레 밝혔지만 경기장에 와 보니 실상은 달랐다. 벤치도 따로 없고 천막을 쳐 놓고 선수들은 옹기종기 모여 경기를 지켜본다.

기자는 유 감독, 김 코치와 함께 간이 벤치에 섰다. 객관적인 전력상 수성중이 한 수 위라고는 하지만 중학생들의 경기는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유 감독은 학생들에게 “심판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자기 플레이에만 신경 쓰라”고 주문한다.

상대와 1골씩 주고받아 2-2가 된 상황에서 관표가 코너킥을 받아 헤딩으로 연결, 상대 골문을 갈랐다. 이어 경기종료 직전 김유상이 중거리 슛으로 쐐기골을 넣으며 결국 수성중의 4-2 승리. 관표가 상대 수비수들의 집중 마크에 고전하자 “아까 테이핑이 제대로 안 됐나”고 말해 기자를 뜨끔하게 만들었던 김동석 코치도 그 때서야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수원·용인 |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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