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이연걸이지만 막상 동작은 레슬링이 돼버렸다. 전영희 기자의 진지한 표정을 배려해서일까. 조교는 “표현력은 고수”라고 전 기자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청주 |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대륙의 무술 우슈 체험
“아뵤∼”를 외치며 콧잔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던 시절이 있었다.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플라스틱 쌍절곤까지 준비하면 이소룡으로 변신 끝. 골목골목 수많은 개구쟁이들은 제각기 이소룡을 사칭하며, 티격태격 장난질을 벌였다.이소룡의 ‘용쟁호투’가 전설로 남은 뒤, 왠지 이소룡의 아류 같은 이름의 배우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취권’의 성룡. 그에게는 이소룡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광대같은 유머가 있었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친구.
이제 술 한 잔 안 마셔본, 골목 아이들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어머니들은 “이상한 영화가 애들을 망쳐놓았다”며 혀를 찼지만, 아버지들은 소주 한 병의 취기로 진짜 취권을 보여준다며 무게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김흥국의 ‘호랑나비’였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이연걸의 ‘황비홍.’ 그는 이소룡-성룡, ‘룡브라더스’와는 또 달랐다. 과장이 없으면서도 굵은 선. 이소룡-성룡 시절의 만화적 요소는 사라졌다. 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무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소룡-성룡 시절에 그랬듯 이연걸을 좋아한다는 꼬마들은 있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 몸짓을 따라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에게는 복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알게 된 사실. 이연걸은 전중국 무술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는, 무림의 고수였다. 진짜 무술을 배워보기로 했다. 11월26일, 충북 청주에서 맹훈련 중인 우슈 대표팀을 찾았다. 5일 홍콩에서 개막한 2009동아시아대회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슈, 종주국 중국을 넘어라
우슈는 무술(武術)의 중국식 발음.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무술은 유파와 권법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1986년 중국의 무술 발굴·정리 작업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해오는 권법의 종류는 129종에 달하고, 병 기계는 도와 검, 곤, 창을 비롯해 수 십 가지에 이른다.
현대의 우슈는 크게 투로(套路) 종목과 산타(散打) 종목으로 나뉜다. 투로는 태권도로 치자면, 품새 경연. 얼마나 동작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득점을 매긴다. 산타는 태권도의 겨루기와 같다.
우슈는 1990베이징아시안게임 정식종목 채택을 계기로 중국에만 갇혔던 틀을 깨고, 국제스포츠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표팀 안희만(43) 감독은 “80∼90년대 운동을 하던 우리는 비디오 세대”라며 웃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체계화된 우슈 이론은 없었다. 중국의 우슈 대회 경기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따라한 것이 초창기 훈련방법. 중국은 각국에 자신들의 투로 점수표준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했다.
종주국에서 기술이 전파되는 방식이다 보니, 만리장성을 넘기란 쉽지 않다. 대표팀 주장 차준열(32·수원시체육회)은 “솔직히 걔네(중국)는 무슨 기계 같다”고 할 정도. 하지만 한국은 2002년 부산대회에서 양성찬(41)이 아시안게임사상 첫 금메달(태극권 남자전능부분)을 획득한 이후, 11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이종찬(25·강원도우슈협회)이 정상(장권종목)에 오르는 등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포권례(包拳禮), 함부로 주먹을 쓰지 않는다
대한우슈협회는 종주국을 따라잡기 위해 중국인 코치를 영입하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했다. 산타부문을 가르치는 한병(25) 코치는 2003년 전중국산타선수권대회 금메달에 빛나는 수준급 지도자. 우슈를 배우기 위해 중국 유학까지 했던 김태호(31·충남체육회)가 통역을 맡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합니다.” 고개를 조아렸는데, 한 코치의 표정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문제는 인사법에 있었다. 우슈에서는 왼쪽 손바닥과 오른쪽 주먹을 포개어 상대방에게 예를 갖춘다. 포권례(包拳禮). 안쪽에서 보면 꼭 ‘사람인(人)’자 모양이다. 무술을 통해 참된 인간에 다가서겠다는 의미. 김태호는 “주먹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쓸 주먹’도 없긴 했지만, 한 코치에게 포권례를 건넸다. 한 코치 역시 방긋 웃으며 포권례로 답례. 우선, 산타종목을 배우기 위해 매트 쪽으로 향했다.
전영희 기자가 간다…대륙의 무술 우슈 체험. 청주|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구르고, 뒹굴고’ 산타가 준 선물, ‘멍 자국’
산타는 60cm 높이의 가로·세로 각각 8m의 매트위에서 동 체급 선수가 2분 3회전 경기를 벌여 2회전을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한다. 1점을 얻는 주먹기술은 권투와 흡사. ‘퍽퍽’ 미트를 때리는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발 기술은 1점부터 2점까지. 허벅지를 때리면 1점이고, 그 이상을 가격하면 2점. 대(大)미트에 강한 킥을 꽂아야 하는데 오른발과 왼발의 불균형으로 애를 먹었다. 도통 허리이상 올라가지 않는 야속한 왼발.
산타가 킥복싱과 또 다른 점은 던지기(등타)기술이 있다는 점이다. 상대를 잡아 매트 위에 넘어뜨리면 점수인정. 이 때 상대가 매트에 떨어진 후, 기술을 건 선수도 함께 넘어지면 1점. 상대만 완벽하게 매트위에 꽂으면 2점이다. 아예 상대를 매트 밖으로 던져서 떨어뜨리는 경우도 2점인데, 한 회전에서 2번 이상 매트 밖으로 떨어지면 무조건 패배다. 던지기 기술은 대역전을 가능케 하는 ‘필살기’인 셈.
강윤식(24·충북우슈협회)의 던지기 기술 전수. ‘구르고, 뒹굴고.’ “우슈가 아니라 씨름 같은데….” 불평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철퍼덕. 등 쪽이 쑤셔왔다.
강윤식과의 1회전 실전 대결. “2분간 마음껏 공격하세요.”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헛발질만…. 노림수는 던지기 기술 뿐.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가, 마치 버스에 매달린 승객처럼 질질 끌려만 다녔다. 비 오듯 내리는 땀, 결국 2분 종료. “여자선수랑 다시 한번 해보면 안 되나요?” 기가 차다는 듯이, 김아리(24)가 이쪽을 노려본다. “저, 이제 투로 종목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꼬리를 내렸다.
전영희 기자가 간다…대륙의 무술 우슈 체험. 청주|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어차피 폼 나지 않는 동작, 승부수는 이소룡 표정과 “아뵤∼”
투로의 경기방식은 체조의 마루운동과 비슷하다. 가로 14m, 세로 8m, 둘레 2m의 코트 위에서 무술연기를 펼치면, 10점 만점에서 동작의 결손에 따라 감점해 순위를 매긴다. 이승균(32·충북우슈협회)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피겨스케이팅처럼 동작의 정확성은 물론이고, 표현력과 예술성도 채점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투로는 크게 장권·남권·태극권 등 권술과 검·도·창·곤술 등 병기술로 나뉜다. 어린 시절부터 손오공을 보며, 꿈꿨던 곤술 도전. ‘찌르고, 때리고, 덮치고….’
곤을 돌리다가 의도치 않게 옆구리와 머리를 자해(?)한 것부터 징조가 좋지 않았다. 머리 위로 곤을 떨쳤다가 땅바닥으로 힘차게 내리 찍는 기술. 곤이 코트에 닿는 순간, 손바닥으로 엄청난 진동이 전달됐다. 작용, 반작용의 원리. 순간,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본의 아니게 튀어나온 이소룡 표정. “표현력은 좋다”는 칭찬이 이어졌다. 어차피 폼 나지 않는 동작. 승부수는 강한 표정과 기합 소리뿐이었다. 누군가가 고수가 될 수 있을지는 언제나 불투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 당신이 만약 이소룡-성룡의 시·청각 효과를 따라하기 바빴던 “아뵤”세대라면, 우슈 도장 안에서도 일단 절반은 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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